2008년 05월 05일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크래쉬]는 결국 [비디오드롬]을 다시 찍은 영화이다. 인간의 욕망은 과학기술의 발전(영상이나 자동차등의 수단)에 의해 점차 증폭된다. 그러나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욕망은 그 용량에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답의 하나로 인간은 자신의 육신을 버리고 더 용량이 큰 다른 육신을 갈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비디오드롬]에서 외친 것처럼. "새 육체에 새 삶을"
이것은 [엑시스텐즈]까지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전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이 필연적으로 공포영화로 분류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육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미지의 것이란 공포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이며 가지고 있는 육체를 잃는 것(그러니까 어쩌면 죽음, 혹은 종말)은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대표하는 감독들 중 가장 상상력이 뛰어난 인물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줄기차게 그러한 종류의 상상력을 드러내왔다. 이러한 상상은 다소 발칙하기는 하지만, 충분히 매력적이다. 인간은 기술과 합일한다. 제임스우즈는 비디오테크와 합일하고(비디오드롬), 제임스 스페이더는 자동차와 합일을 꿈꾸는 듯 보이며(크래쉬), 주드로는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에 서 있다(엑시스텐즈).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제시된다. 과연 크로넨버그가 인간이 기술과 합일하는 것을 진화의 한 프로세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상상력은 진화에 대한 것일까, 종말에 대한 것일까.
어느 부분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신체의 재형성이란 유치한 이야기일 뿐, 그것의 실체는 죽음에 다가서는 것임을 지적한다. [크래쉬]에서 본(엘리아스 코티어스 분)은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본의 이 대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들에 대한 크로넨버그의 대답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깊게 관여되어 있어. 과학기술에 의한 신체의 재형성이지."
그러나 잠시 후 본은 이렇게 말한다.
"죽은 이들의 강한 성적 에너지를 전달하는거지. 그것을 경험하고 재현하는거야. 그게 내 프로젝트야."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 신체의 재형성은요?"
"그것은 유치한 관찰적 재연일 뿐이야. 그건 단지 표면에 떠서 아무도 위협하지 않아. 내 잠재적인 파트너들의 반응을 테스트하는거지."
결국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이 끊임없이 환기시키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진화라기보다는 과학기술에 함몰되어 인간본연의 모습을 상실해가는 그런 시류에 대한 불안함이다. 과학은 하루가 멀다하고 변해가지만, 인간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즉,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급속도로 변해가지만 그 안에 사는 인간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극단을 달리는 의학을 습득한 두 주인공이 결국은 내면에 의해 붕괴되는, 그러니까 외적으로는 발전을 거듭했지만 내면에 소홀한 죄로 파국에 도달한 [데드링거]는 바로 이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즉, 크로넨버그는 [데드링거]를 통해 신체변형(인간의 외부)과 관련하여 할 수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이미 다 한 셈이었다.
2008. 5. Arborday.
# by ArborDay | 2008/05/05 12:24 | 공포/호러 | 트랙백(1) | 덧글(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