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엑스파일

어찌하여 그는 공각기동대를 포기하고 엑스파일을 선택하게 되었는가.

공각기동대 트릴로지를 사겠다고 마음을 먹고난 후부터 저도 모르게 공각기동대 TV판을 기웃거리기 시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개별작품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해도, 보지도 않은 시리즈의 총집편을 사는 것이 조금 찜찜한건 사실이다. 그럼 TV판을 살까? 지름신은 이렇게 찾아온다. 조금 두려워졌다. 이건 좋지 않은 패턴이야. 다행히도 이빨빠진 컬렉션은 안한다는게 내 지름철학인지라 공각기동대에 대한 관심은 품절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억눌렸다. 억눌렸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공각기동대를 사지 않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늘의 뜻인거니까.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오프매장 한 곳에서 공각기동대1기 박스 3개가 온전히 구비되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게다가 2기조차도 같은 날 dp장터에 올라온 터였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극장판은 구하기 쉬우니 문제가 아니다) 하늘의 뜻은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은 나를 조롱하며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억제력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뇌리를 스치는 생각, 이걸 확 질러?
3만원대의 공각기동대 트릴로지 박스에서 시작한 가벼운 지름욕구는, 30만원에 달하는 중대한 선택이 되었다. 게다가 내가 본 공각기동대는 극장판 1기밖에 없음을 감안할 때, 이건 겁없는 지름에 가까웠다. 게다가 몇 달째 지켜온 한 달 15만원 - 물론 플러스마이너스를 적당히 허용하는 느슨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 원칙도 눈감아야 한다. (스스로의 구매원칙을 깨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경험이 많은 것을 알려준 바 있다.)

일단 쉬운 것부터 하자. 처음부터 사려고 했던 [미스트]와 [어톤먼트]를 집어드는 것은 수월했다. 2000원짜리 [뎀]을 함께 주워드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피해갈 수 없는 순간은 금새 닥치는 법이다. 공각기동대 트릴로지. 손에 들었다가 또 꽂아놓고, 다시 손에 들었다가 또 꽂아놓았다. 또 하나의 내가 나에게 말한다. "이 지름은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 충동구매로 이어질거야. 신중해야해." 그리고 다른 내가 답한다. "어차피 살거면서." 결론없는 논쟁이다.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한다.
그러고는 물건을 째려보며 대화를 시도해본다. "어이 박스, 난 너를 잘 모르는데 너 그만한 가치가 있어? 대답해봐." 당연하게도 대답이 있을리 없다. 난 바보다.

그러다가 돌연 (아, 이게 웬 황당한 전개!) 어차피 대규모 지름이라면 [엑스파일]을 사는게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엑스파일]은 물량이 넉넉하니 한달에 한시즌씩만 구매할 수도 있고(원칙적으로는), 안그래도 몇 번 집었다가 놓은 박스이기도 했고(적어도 공각기동대만큼은 그리워했을거다), 가격도 착하고, 무엇보다도 내 취향의 드라마임이 확실하거든(실은 꽤 많은 에피소드들을 감상하기도 했다). 공각기동대의 쉴틈없는 유혹에 만신창이가 된 내게 더 이상 생각할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새 내 손에는 [엑스파일] 1시즌이 들려있었다. 이건 합리적인 선택이었어라고 말해보지만 뭔가 개운치 않다.

어찌 되었건 그런 과정을 거쳐 나는 [공각기동대]의 세계를 거부하고, [엑스파일]의 세계에 정식으로 입문했다. 그러나 어쩌면 (아마도) [공각기동대]와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2008. 5. Arborday.



by ArborDay | 2008/05/16 15:56 | 영화잡담 | 트랙백 | 핑백(1) | 덧글(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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