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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이종격투기장 - 세븐데이즈

[가발]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걸친 듯한 느낌을 주었다면, [구타유발자들]은 그야말로 원신연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간단하게 [구타유발자들]은 물리적 폭력의 순환에 대한 이야기이다. 철로가 지나갈 정도로만 공개된 - 어지간해서는 바라보는 것이 고작일 - 공간에 물리적 폭력을 집중함으로써 탈출이 보이지 않는 폭력의 순환고리와 무심한 방관자들 - 취향에 맞지 않는 오페라를 보듯 - 에 대한 이야기를 펼쳤고, 학교와 군대라는 대한민국의 양대 폭력시스템을 언급함으로써 체계를 잡은 다양한 폭력에 대한 암시 즉 그의 세계관이 더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겼다. 그러나 이 작품은 관객을 배려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한 작품이었다. 그 결과 좋은 구석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작품은 대중에게 외면받았다.1) 그러한 맥락에서 [세븐데이즈]는 원신연이라는 감독이 상업영화라는 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시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임필성이 (아직) 해내지 못한 것을 해냈다. 그것도 훌륭하게. 그는 튼튼한 서사 속에 자신의 색깔을 덧입히는데 성공했다.

[세븐데이즈]는 겉보기에는 분명 유괴영화이자, 법정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 [세븐데이즈]의 정체는 폭력영화이며, [구타유발자들]의 연장선 하에서 이해되는 것이 옳다. [세븐데이즈]의 한 소재인 유괴는 모성이라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 하에서 하나의 수단으로 격하된다. 그와 동시에 감독은 딸을 살려돌려보냄으로써 유괴의 범법성에 대해 생각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 교활함을 보이기도 한다.2) 법정은 단지 그 공간을 빌려주는데 그친다. 그 탓에 윤리는 서사에 묻혀 관객의 곁을 (잠시간) 떠난다. 그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공정성이란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무엇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그리고자 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무죄라고 생각해요?"라는 대사에서 드러나듯, 캐릭터들이 추구하는 것은 공정함이 아니라 제 관심사이다. 변호사는 자신의 승리를, 범법자는 자신의 석방을, 권력자는 치부의 은폐를 추구한다. 유괴범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도 제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다. [세븐데이즈]는 이같이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폭력의 향연을 그려낸다.

내가 [구타유발자들]을 보고나서 정말 미칠 정도로 갑갑했던 것은 영화가 다루는 폭력이 단지 물리적 폭력에 한정되고, 동시에 고작 순경 나부랭이 - 순경을 무시하고자 함은 아니다, 단지 파급효과에 대한 차이를 둔 것 뿐이다 - 의 폭력에 국한된다는 사실이었다. 물리적 폭력은 때로는 가장 효과적일 수 있지만, 동시에 가장 원시적이고 하등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 계급의 인간들이, 좀 더 고등의 폭력을 행사한다면3) 어떤 모습일까? [세븐데이즈]는 그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세븐데이즈]는 [구타유발자들]보다 한 차원 높은,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폭력을 다루고 있다. [구타유발자들]의 다리 밑 공간은 진실을 떠난 법정, 수많은 사람이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운동장의 한 복판, 그리고 가장 평온한 공간인 '마이 스위트 홈'까지 확장된다. 각각의 플레이어들은 그 거룩한 콜로세움에서 자신의 강점들을 이용해 싸운다.4) 변호사는 법지식과 말빨로 승부하고, 높은분은 권력을 남용하고, 깡패는 주먹과 공갈로 맞선다. 아무 것도 없는 이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는 수단을 가릴 여유가 없다. 그는 변호사의 딸을 유괴함으로써 대리전을 벌인다.

즉, 영화는 흡사 '어떤 종류의 힘이든 인정할테니 어디 한 번 싸워보자'는 식으로 그려진다. 결국 원신연에게 이 세상,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특정한 룰이 없는 이종격투기장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싸움에서 누가 이길까? 답은 뻔하다. 결국 센 놈이 이기는 것이고, 이기는 놈이 센 것이다.

물론 [세븐데이즈]가 [구타유발자들]보다 훌륭한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관객을 배려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 이는 흔치 않다. 게다가 이 정도 수준의 상업영화를 만날 수 있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그것이 내가 [세븐데이즈]를 지지하는 이유이다. 기억의 한 편으로 묻어두었던 태권브이가 어떤 식으로 재현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2008. 5. Arborday.


1) 물론 쥐를 먹는 장면과 같은 부분의 삭제에서 볼 수 있듯 [구타유발자들] 역시 갈데까지 간 작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이 외면받은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갈데까지 간 원신연의 작품이 보고 싶은게 사실이다) 딱히 친절한 작품은 아니었던 것이다. 덧붙여 [구타유발자들]의 가장 멋진 설정은 차예련의 팬티를 벗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사라진 팬티 한 장은 수컷들의 폭력적 본능에 불을 지핀다.

2) 생각할 틈이 없도록 만드는 것에 일조하는 것은 이 작품의 현란한 편집이다. 정적인 카메라를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 때문에 [세븐데이즈]의 너무 많은 샷은 솔직히 거슬렸다. 테크닉 과잉이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없는 카메라는 목적성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세븐데이즈]의 전반적 서사 구조는 튼실한 편이지만 세부적으로 볼 때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다소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 경찰들, 그 정도 물증 못 찾아낼 정도로 수준이 낮지는 않다. 그러나 카메라의 속도감은 사소한 단점들을 가려주며 동시에 유괴의 정당성과 같은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할 틈을 관객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3) 예상할 수 있듯 본질은 같다. 폭력에 고등, 하등의 차이가 뭐가 있겠는가. (본문의 하등, 고등의 분류는 편의상의 구분이다. 대충 뜻은 통하리라 생각한다.)

4) [구타유발자들]도 이와 흡사한 장면이 있다. 교수는 위엄을 떨며 잠시간 양아치들을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상황은 반전된다. 그 이유는 그가 손을 떠는 것을 양아치가 보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 법정이 아니라면 대체로 주먹은 법보다 빠르고, 한적한 곳이라면 대체로 주먹은 펜보다 세다. 어디서든 - 심지어 블로그스피어에서도 - 홈 어드밴티지란 존재하는 법이다.

by ArborDay | 2008/05/11 12:36 | 비호러 | 트랙백(1)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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