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14일
0. 대부분 읽은지 꽤 오래 지난 책들이라 어차피 세세한 리뷰는 어려울 것 같으니, 흔적만 간단하게 남긴다. 늘 그렇듯 편견과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1. 솔직히 천명관의 글쓰기에 홀딱 빠졌다. 그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장르를 가리지 않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로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흡사 쾌락에의 탐닉과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지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작가적 자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 (뭔가 늘어놓고 싶은데 정리가 잘 안되니 여기까지만) 다만 가르치려는 생각이 없어보일 뿐이다. [고래]도 [유쾌한 하녀 마리사]도 모두 추천할만하다. 유쾌한 아이러니와 발견의 순간들이 있는 작품들이다.
두 가지 질문. 첫째,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책 앞 표지에 친필싸인이 있는데, 모든 책에 하나하나 다 적은건가? (그러니까 싸인이 없는 책을 구매한 이가 계시는가?) 둘째,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실린 [프랭크와 나]가 그가 등단했다는 그 작품이 맞는가?
2. 황석영을 모르고 요즘 소설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을 몇 번 지나친 적이 있어 하나 골랐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커서 그랬는지, 실망도 무척 컸다. 내가 집어들은 책은 [바리데기]였다. [바리데기]는 조금 쥐어짜는 감이 없는건 아니나 기본적으로는 너무 착한 소설이다. 현실은 지옥이요, 해결책은 용서다. 너무 착한 소설을 원래 환영하지 않는 성향 탓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게 꽤 진부하다는거다.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든 보편적으로 감싸안을 수 있는 이야기임은 알고 있으나 글쎄? 내 주위에 이걸 읽은 사람들은 다들 좋다고 난리들이니 내가 이상한거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황석영의 다른 소설을 읽어봐야겠다. 달리 읽어본게 없으니(장담할 수는 없다) 추천 좀 해달라.
3. 김영하도 첫 만남. 작품은 [퀴즈쇼]. 젊은 세대의 고충을 다루는 듯 하여 초반부에는 몰입하여 읽었지만, 갑자기 안드로메다로 떠나버리는 후반부에 들어서는 시큰둥해졌다. 전반적으로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다. 영퀴방을 들락날락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해준 것이 그나마 즐거웠던 전부였다. 쓰다보니 오늘 삐딱한 느낌이네.
4. 내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광팬인 것은 예전에도 설명한 바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또하나의 몬스터] 역시 출간과 동시에 사서 읽었다. 하지만 팬북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인지(처음 접해보았다), "아, 이런 것도 팔리는구나." 외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그 어떤 언어의 리듬감도 없이 읽어내려가는건 시간낭비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그러한 느낌의 가장 큰 이유는 매끄럽지 않은 번역 탓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5. 지금은 이언매큐언의 [속죄]를 읽고 있다. 언젠가는 책을 한 권 내보리라 달콤한 공상에 빠질 때도 있지만, 이런 인간을 만나면 그게 그냥 꿈임을 깨닫게 된다. 하루동안의 이야기를 거의 300 페이지에 가깝게 풀어갈 수 있다니 그게 사람인가? (길게 늘리는 것이 부럽다는 얘기가 아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의 밀도다.) 어쨌거나 이 작품 정말 잔인하다는 생각마저 들지만, 압도적으로 좋은 작품이다. 호흡이 빠른 일본소설을 주로 읽느라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읽히는 리듬감이 장난이 아니다. 책을 다 읽고나면 영화도 봐야지.
이 작품을 읽은 것을 계기로 영미권이나 유럽의 소설을 조금 읽어보려 한다. [악의영혼]이라는 책이 평판이 좋은 듯하여 주문했는데 기대된다.
6. [속죄]에서 인상에 남는 구절 2개. 물론 괜찮은 구절은 수도 없이 많은데, 하필 비슷한 페이지에서 2개만 추린 이유는 여기쯤이 오늘 읽은 분량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래24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북클립을 한 번 써보고 싶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문득 로비는 자신이 도살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모두 그곳을 향해 가고 있었고,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 이언매큐언, [속죄], p339
기다릴께. 돌아와. 그토록 소중했던 이 말도 지금은 그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수학공식처럼 분명하고 감정이 배제된 일임이 분명했다. 기다림. 상대방이 다가올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기다림이란 너무나 힘겨운 말이었다. - 이언매큐언, [속죄], p368
7. 주문하는 김에 [월하의 여곡성]도 주문했다. 이런건 읽기 전이라도 추천이다. 여자귀신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지나치지 마시기를.
2008. 5. Arbo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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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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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ArborDay | 2008/05/14 15:36 | 애니/서적 | 트랙백 | 덧글(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