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잖은 영화들이 아이를 잃은 부모라는 설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남편과 바다에 나갔다가 처참한 고통을 겪거나(죽음의 항해), 관계의 위험에 놓인 이들 - 가장 흔한 이유는 자식을 잃은 것이다 - 이 여행에서 죽음의 기로를 마주하거나(베이컨시, 디센트), 아이를 잃고 난 후 이사한 새로운 곳에서 악몽과 조우하게 된다(체인즐링). 이러한 설정의 변주는 무수히 많다. 물론 아이를 잃었다는 것은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만 확장하면 다른 종류의 고통들 역시 손쉽게 이와 같은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뻔한 설정의 작품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러한 영화들은 결국 어떤 트라우마에 대한 주인공의 극복기를 그려내는데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추가적인 고난은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후폭풍과 다르지 않다. 영화 속의 두 가지 사건들은 인과관계에 놓이게 된다. 즉,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보는 사건은 앞의 설정이 없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고통을 하나의 사건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죽고 싶은 심정이, 생사의 기로를 마주한 공포감보다 못할 것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영화들의 결말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극복하거나, 그러지 못하거나. 사는지 죽는지가 아니라, 극복하는지 그러지 못하는지가 이런 부류의 작품을 해피엔딩으로 만들거나 배드엔딩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물론 살아남는다면 대개의 경우에는 시간과 망각이 인간을 무디게 만들어줄테지만.
우리의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 무언가에 대한 극복의 연속이다. 삶은 결코 인간이 마음 먹은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죽을만큼 괴로웠던 - 고통의 크기란 상대적인 것이다 - 순간들은 아마도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것들 -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 - 을 극복하며 현재에 이르렀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자신을 조금 더 칭찬해줘도 괜찮을 듯 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충분히 대견스러운 일이니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2008. 9. Arborday.
덧. [베이컨시]를 뒤늦게 보고. 원래는 영화평을 작성하려고 했었는데 쓰다보니 다른 길로 새버렸다. 그래서 덧붙인다. 간만에 본 참으로 깔끔하고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