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7월 14일
그래도 카메라는 돈다 - REC

[REC]는 저예산의 비교적 단순한 영화다. 그래서 [REC]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글들은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1인칭 카메라의 압박이 어떠니,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어떠니, UCC 시대의 영화가 어떠니 등등. 물론 이러한 설명들은 모두 옳다. 그러나 나까지 나서서 구태의연하게 그런 말들을 한 번 더 반복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는 것은 섭섭할테니 한 가지만 말해두기로 하자. 올여름 개봉작 중에 절대 놓치지 말아야할 호러영화가 있다면, [REC]는 그 중의 한 편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라는. [REC]는 정말 괜찮은 영화다.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어둠을 다루는 솜씨는 이 영화에서도 충분히 발휘되고 있으며, 긴장감을 뽑아내는 솜씨 역시 능숙하게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많은 글들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우메 발라구에로가 영화 속에 역사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그는 역사를 숨기는 행위, 즉 진실을 감추는 행위에 신경질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돌이켜보면 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과거가 문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따라가다보면 꼭 숨겨진 - 모르고 있던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이다 - 과거가 나온다. 딸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나치대학살까지 들먹이게 되었던 [네임리스], 끔찍한 역사가 싫어서 자식을 죽여가며 종말을 꾀하는 사교도집단의 노력을 그린 [다크니스], 학대받았던 기계소녀(?)의 분노를 다룬 [프레절]까지.
[REC]는 경찰에 의해 봉쇄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작품이다. 아파트에 갇힌 자들의 인권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대의명분을 위해 버려진 것이다. 그럼 왜 하필 이 아파트에서 그러한 소동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이 곳에 실험에 사용된, 그러나 실패한 실험의 대상자가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참극은 자신들의 실수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숨겨버린 과거로부터 온 것이다. 이는 전작들과 맞닿아 있다. 또다시 이 곳을 봉쇄하게 된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무엇인가를 감추었던 그 곳에서 문제가 새어나오고 있는데도, 그 곳을 또다시 감추려고 한다는 설정은 같은 실수가 현재에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40년전 실패한 의식을 완수하고자 했던 [다크니스] 역시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하우메 발라구에로는 영화를 통해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기를, 그리고 동일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실은 묻힐 수 없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돌아간다. 사람은 죽어없어질지라도 카메라는 남는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될리도 없고, 어떤 사건이 후세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리도 없다. 따라서 매듭을 지어야 한다. 하우메 발라구에로가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발라구에로가 비슷한 이야기들을 반복하게끔 만들었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진부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스페인 사람이며, 스페인 내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인내전의 사후처리 방식이 어떠했는가. 타협(대의명분)에 의한 과거와의 단절 - 다시 말하면, 미해결된 역사 - 이 아니었던가. 그의 영화들에서 주로 고통받는 것은 아이들이다. 이 역시 당연하다. 끔찍한 시대에 가장 고통 받는 것은 가장 유약한 존재일테니까.
솔직히 나는 발라구에로가 1인칭 카메라시점의, 유사다큐멘터리 형식의, 좀비물을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소 의아했다. 과연 그가 좀비물의 장르 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 특히 후반부 - 를 보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노골적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던 초보감독의 치기는 사라졌을지라도, 그는 뚝심있게 같은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 쯤 되면 그를 한 명의 작가로 인정해줘도 괜찮을 듯 하다. 나는 언젠가 발라구에로가 스페인 내전을 다룬 대표적 감독 중 한 명으로 거론되어야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의 팬이다.
2008. 7. Arborday.
덧. 물론 그의 최우선 목표는 늘 '공포'의 전달이었다. 그 사실은 나도 안다. 그래서 다소 멀리 나간 것이 분명한 이 글에 반감을 가지실 이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은 은연 중에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법이다. 전작들과의 연계성 하에서 내가 느낀 것을 말하고 싶었던거라고, 한마디만 덧붙여보자.
# by | 2008/07/14 10:36 | 공포/호러 | 트랙백(3) | 핑백(1) | 덧글(3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제목 : 알.이.씨 ([Rec], 2007)
[Rec] 감독 자우메 발라구에로, 파코 플라자 (2007 / 스페인) 출연 마누엘라 벨라스코, 비센테 힐, 페랑 테라자, 파블로 로소 상세보기 ★★★☆☆ 스페인에서 온 좀비 영화입니다. (2008)는 결국 안보고 말았습니다만, 그와 마찬가지로 좀비가 출몰하는 상황을 카메라맨이 녹화하는 방식으로 촬영한 작품이라더군요. 그러니까 3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닌 현장에 함께 하고 있는 1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볼 수 있게 한다는 기획 의도였던 것.....more
제목 : REC과 클로버 필드
이달에 본 좀비영화 중에 최고작이다. 파블로만 외쳐대는 여주인공 때문에 짜증나기는 하지만 뭐 저런 상황에서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여자가 있는 것도 있을만한 일이니 패스.아무튼 아직 못 보신 좀비영화의 팬이라면 한번 보기를 권한다. 앞부분이 살짝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분들은 시작하자마자 좀비가 튀어나오길 원하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하. 클로버필드는 왜 같이 붙여놨냐 하면 어디서 듣기는 들었는데 정확한 기억이 안나서 본 ......more
제목 : [Rec] (2007)
[Rec] 감독 : 자우메 발라구에로, 파코 플라자 출연 : 마누엘라 벨라스코, 비센테 힐, 더보기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절대 견딜 수 없다! 리얼TV다큐 프로그램의 리포터 안젤라와 카메라맨 파블로는 소방대원들을 따라 .. 더보기...more
... essblog.co.kr/mailing/080619_1/images/vod2.wmv원래 전혀 관심도 없다가,<a href="http://arborday.egloos.com/3824287">Arborday님이 '올여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호러영화</a>'라고 적어두신 걸 보고 얼른 달려가서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랜만에 정말 무서웠다. 거의 고2때 본 ... more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덮고 방치하면 미래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 맞는 말입니다.
공포영화는 때로 뛰어난 사회 풍자, 비판을 해내기도 하지요. 이 작품도 그런 작품 중 하나로군요.
영화 자체는 꽤나 좋았습니다. 게다가 누가 녹화해서 보여주는 그런 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보는 식으로 진행되는 얘기라서 현장감이 있더군요.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다는데 어떻게 나올지 기대됩니다.
헐리웃의 리메이크를 딱히 기대하지는 않습니다만(전 유로호러 매니아가 틀림없는 것 같아요), 속편이 나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드네요. 즐거운 영화였습니다.
볼 수 있는 거로군요. 감독의 전작은 <다크니스> 하나 봤었는데 이젠 거의 기억도 안납니다.
<알.이.씨>는 마지막 다락방 장면에서 '감춰진 진실'이 드러나는 부분이 확실히 좋긴 했는데
너무 말미에서야 갑자기 나온데다 곧바로 이어지는 엽기호러쑈 때문에 그거 음미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는. 리얼리티 쇼 포맷이 아니라 일반적인 장르물로 풀어서 만들었어도 괜찮았겠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3인칭 시점을 고려한 1인칭이라는 리뷰, 마음에 들었어요.
잠깐 보는데, 5회초 삼성이 3대 2로 역전에 성공하자 파란옷에 V자 치켜들고
좋아라하는 관중이 얼굴에 잡혔는데 ArborDay님이랑 너무 똑같이 닮았더라는.
이런 시점으로도 이 영화를 볼 수도 있군요. 감독의 전작을 보지 못해서 (그 좋다는 다크니스도요) 잘 몰랐는데... 한 수 배웠습니다 ^^
여주인공은 실제 스페인에 있는 심야 프로그램인 <당신이 잠 든 사이에>의 리포터라고 합니다. 그런데에도 연기를 너무나도 잘하더군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겁을 먹고 하는 모습이 악몽을 잘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리포터 본연의 모습도 잘 소화해냈고요.
덧붙여 한가지. 감독이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전체적인 상황과 콘티와 몇 가지 중요한 대사만을 알려준 체 나머지는 모두 전적으로 배우들에게 맡겼다고 하네요. 즉, 모든 상황은 애드립이라는 소리가 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또 다시 영화를 봤습니다. 배우들이 실로 대단하게 보이더군요.
아쉬운 부분은 분명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캐릭터들의 상황이 한 줄의 대사로 함축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을 조금 더 살려서 인간과 인간과의 충돌을 더 보여줬으면 괜찮았지 않았나 싶네요. 일본인들에 대한 이야기나,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나 말이죠.
마지막의 콜롬비아 소녀는 좀비 영화 역사상 가장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네요. 모두 죽고, 마지막 리포터가 끌려가는 모습은 블레어위치의 마지막 장면 (카메라가 뚝 하고 멈추는... 전 그 장면 봤을때 심장이 멎는 줄 ㅡ.ㅡ;;)이 떠오르더군요. 순간 오마쥬나 패러디가 아닐ㄲㅏ는 생각도 들더군요 ^^...
몇 일 있다가 저도 짤막한 감상 올릴께요 ^^
트랙백 기다릴께요~
자주 방문은 못했어도 이따금씩 생각나고 궁금해지는 블로그였답니다.
잘 지내시죠??
그나저나 초하님의 블로그, 간만에 구경하고 왔네요. ^^
잘 지내시죠? ^^
덕분에 좀 더 다른 면에서 영화를 되짚어보고 갑니다^^
영화를 보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 그것이 감독의 의도가 아닐지라도 - 은 분명 관객을 더 풍요롭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영화 중간에 소방관(?)이 윗층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감독이 연기자들한텐 말 안하고 찍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연기자들은 그 장면에서 정말 놀란거라고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