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크래쉬]는 결국 [비디오드롬]을 다시 찍은 영화이다. 인간의 욕망은 과학기술의 발전(영상이나 자동차등의 수단)에 의해 점차 증폭된다. 그러나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욕망은 그 용량에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답의 하나로 인간은 자신의 육신을 버리고 더 용량이 큰 다른 육신을 갈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비디오드롬]에서 외친 것처럼. "새 육체에 새 삶을" 이것은 [엑시스텐즈]까지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전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이 필연적으로 공포영화로 분류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육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미지의 것이란 공포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이며 가지고 있는 육체를 잃는 것(그러니까 어쩌면 죽음, 혹은 종말)은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대표하는 감독들 중 가장 상상력이 뛰어난 인물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줄기차게 그러한 종류의 상상력을 드러내왔다. 이러한 상상은 다소 발칙하기는 하지만, 충분히 매력적이다. 인간은 기술과 합일한다. 제임스우즈는 비디오테크와 합일하고(비디오드롬), 제임스 스페이더는 자동차와 합일을 꿈꾸는 듯 보이며(크래쉬), 주드로는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에 서 있다(엑시스텐즈).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제시된다. 과연 크로넨버그가 인간이 기술과 합일하는 것을 진화의 한 프로세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상상력은 진화에 대한 것일까, 종말에 대한 것일까.
어느 부분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신체의 재형성이란 유치한 이야기일 뿐, 그것의 실체는 죽음에 다가서는 것임을 지적한다. [크래쉬]에서 본(엘리아스 코티어스 분)은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본의 이 대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들에 대한 크로넨버그의 대답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깊게 관여되어 있어. 과학기술에 의한 신체의 재형성이지." 그러나 잠시 후 본은 이렇게 말한다. "죽은 이들의 강한 성적 에너지를 전달하는거지. 그것을 경험하고 재현하는거야. 그게 내 프로젝트야."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 신체의 재형성은요?" "그것은 유치한 관찰적 재연일 뿐이야. 그건 단지 표면에 떠서 아무도 위협하지 않아. 내 잠재적인 파트너들의 반응을 테스트하는거지."
결국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이 끊임없이 환기시키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진화라기보다는 과학기술에 함몰되어 인간본연의 모습을 상실해가는 그런 시류에 대한 불안함이다. 과학은 하루가 멀다하고 변해가지만, 인간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즉,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급속도로 변해가지만 그 안에 사는 인간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극단을 달리는 의학을 습득한 두 주인공이 결국은 내면에 의해 붕괴되는, 그러니까 외적으로는 발전을 거듭했지만 내면에 소홀한 죄로 파국에 도달한 [데드링거]는 바로 이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즉, 크로넨버그는 [데드링거]를 통해 신체변형(인간의 외부)과 관련하여 할 수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이미 다 한 셈이었다.
제목 : 크래쉬 [Crash] (1996) 나는 충돌한다. 고로 존재한다.*2004년 폴 해기스 감독의 크래쉬가 아닙니다.데이빗 크로넨버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변태적이다. [플라이], [네이키드 런치]의 신체와 관련된 상상력, [비디오드롬], [엑시스턴즈]의 생체적인 도구들, [스파이더], [엠 버터플라이]의 금기된 성적 소재 등 그의 영화는 불온한 상상력들이 넘쳐난다. 이 중 [스파이더], [플라이]만 제대로 봤지만, 그의 영화는 편하게 볼 수 있는 부류는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more
한 때 동어반복을 하는 감독들을 그다지 안 좋아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감독이란 부류,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 -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은 한 가지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죠. 크로넨버그는 이 장르에서 언급될 수 있는 감독들 중 작품성으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3인 중 한 분이시랍니다. (다리오 아르젠토, 존 카펜터, 그리고 크로넨버그) 특히 크로넨버그는 졸작을 만든적이 한 번도 없는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크래쉬]가 얼마나 좋은 영화인지에 대한 설명은 중언부언하는 것 같아서 생략했답니다. 충분히 좋은 영화죠.
[스캐너스] 참 좋지요. 저도 이준님 말씀처럼 후속편들에 불만을 가지고 있답니다. [스캐너스]도 말할거리가 참 많은 작품이지만(그건 차후로 미루기로 하고), 무엇보다도 두 형제의 염력싸움 장면에서 감탄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치하게 보일 것만 같은 그 장면을 어찌 그리 긴장감 있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 놀랍더라구요. 째려보고 힘줄 솟고 그런건데, 참.
물론 매니아들에게 늘 거론되는 수박터지듯 폭발해버리는 머리씬과 같은 장면도 시원해서 좋았지만요. ^^
근사한 평론이라니 정말 감사드려요. [크래쉬]는 꼭 봐둘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강박적 카메라도 매력적이고, 영화가 제공하는 감정적 쇼크도 만만치 않답니다. giantroot님의 말씀처럼 정말 상상한 것 이상을 보게 될 영화라고 생각해요. 아 참, [스파이더]는 감독의 한 전환점에 놓인 작품이에요. 그 전의 작품들, 아마 새로우실 겁니다.
[초인지대]는 크로넨버그의 작품 중 상대적으로 가볍고 재미있는 작품이고, 동시에 크리스토퍼 워큰이 참 귀엽게 나온 작품이지요.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고 의사와 말할 때 짓는 그 미소, 제가 여자였다면 숨넘어갔을지도 몰라요. [M.버터플라이]의 마지막 장면은 제게도 엄청 충격적이었답니다. 비고모텐슨이 있기 전, 크로넨버그의 페르소나는 단연 제레미 아이언스였다죠.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간에.)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은 몇번씩 다 봤지만, 요녀석을 아직도 못봤네요. 야한것으로 어필하는 영화와 홀리헌터가 왠지 미스매치인 것 같아서 그랬던것 같아요. 싼맛에 돌아다니길래 출시판(이것도 리핑판인가요?)을 가지고 있기는한데 암전이 많다는 얘기도 어디서 들은것 같고... 그래도 이제 한번 볼 때가 된 것 같아요. 형님 평을 보면 미루던 영화도 보게 되는 마력이. ^^;
제가 소싯적, 크로넨버그나 그리너웨이, 린치 같은 감독들에 버닝했던 시절이 있었는데..(지금도 좋아하지만)
그런 절 보고 "악취미"라고 평하던 친구가 있었지요.
저는 "네가 아직 순진해서 진짜 악취미가 뭔지 모르는구나!" 라며 숨겨놓은 보따리를 풀려다가,
인간관계 망가질까봐 그만두었던 옛날 추억이 생각나네요. 그때는 정말 영화만 줄창 보며 돌아다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