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립스틱]은 하루에 두 번 강간당한 더럽게 재수없는 데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어, 사체훼손, 연쇄살인 등의 자극적인 소재로 뻗어간다. 그러나 자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의외로 담담한 편이다. 굳이 그 이유를 밝히자면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이야기가 보다 보편적인 무엇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옷을 만드는게 그녀의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자각이 전혀 없다. 친구들은 남정네들과 놀아나기를 좋아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그녀는 강간을 당한 후 여성으로서 자각하기 시작한다. 강간을 당한 후 여성을 발견한다는 설정은 상당히 불쾌할 수 있겠지만(실은 난감하기는 하다), 조금 변명을 하자면 이 영화가 중점을 두어 다루는 것은 성폭력이 아니라는 점을 들고 싶다. 그러니까 여성으로서의 자각이란 시스템 속에서 남성보다 열등한 여성의 위치를 발견한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초반부의 교차편집은 이런 의심에 대해 어느 정도의 근거를 제시한다. 관객이 성기의 삽입을 기대하는 순간은, 데나의 집으로 공간을 바꾸어 서랍을 뒤지는 장면으로 갈음된다. 즉, 강간과 도둑질이 별 차이 없이 그저 여성이 남성에게 무언가를 빼앗기는 모습으로 (필요에 의해서) 동일화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데나의 여성으로의 자각은 스크린에서는 구체적으로 성적인 모습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녀는 타인의 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짙은 화장과 들러붙는 가죽바지를 입기 시작한다. 구조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정립된 사회에서, 그녀는 착한 남자와 악한 남자를 구별할 이유가 없다.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총구를 겨눈다. 그러니까 그녀는 여성을 대변해 궐기한 투사이며, 사회악에 대한 일종의 구원자로서 자신을 재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싸움은 남자의 방식과 똑같다. 눈에는 눈, 총에는 총. 그러나 남자의 방식에 대해 남자의 방식으로 맞선 이 여인이 패배할 것임은 대충 짐작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가장 큰 방해꾼들은 여성이다. "아니 도대체 여자인 네가 왜 날"이라고 말하는 듯한 엔딩씬은 그래서 더욱 슬프다.
영화는 폭력을 당한 이에게 우연히 총 한 자루가 주어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방아쇠를 당기던 여주인공은 영화가 계속되면서 점차 폼나게 총질을 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폭력에 도취되어 급기야는 자신을 구원자로 재정립하는데, 이는 [택시드라이버]에서의 트래비스와 비슷하다. 어쩌면 [복수의 립스틱]은 아벨 페라라 버전의 [택시드라이버]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의 대사를 앞두고 수녀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비추어보는 장면은 모히칸 머리를 하고 후까시를 잡는 트래비스를 떠오르게끔 만든다.
스무명도 넘는 사람을 죽였음에도 [복수의 립스틱]은 죄의식이라고 불릴 수 있을만한 부분에는 거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확신범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박찬욱의 말대로 이 영화가 미리 찍은 [어딕션]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피를 빠는 흡혈귀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피를 빠는 것은 흡혈귀이기 때문일 뿐.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은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며, 그런 인간군상의 모습은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뉴욕을 통해 재현된다. 인간이기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아벨 페라라가 줄곧 그려내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아벨 페라라의 [악질경찰]이 죄를 지은 이의 죄의식과 구원의 문제 - 그러니까 [복수의 립스틱]에서라면 여주인공 자신의 구원 - 까지 다루는 식으로 좀 더 발전했다면, 거추장스러울지도 모르는 관념을 제거해버린 [분노의 립스틱]은 보다 화끈하고 재미있다. 조타메리스의 총질만 보고 있어도 짧은 러닝타임이 아쉽게 느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