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매니아들의 입소문 때문에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 쯤은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는 작품이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영상자료원 등의 리스트에 자주 오르기도 했고. 어쨌거나 어제 완독한 김영진의 [평론가매혈기]에 이 작품 이야기도 실렸길래 생각난 김에 포스팅한다. (작품을 만들고 시간이 지난 후)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김기영 감독은 이 작품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듯 했고,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나는 예술을 하려고 한게 아니다. 나는 내 취미대로 영화를 가지고 놀았다."라는 말은 남아 있다.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극장 기획에서 개봉까지 불과 23일밖에 걸리지 않았던 날림작품이었음에도,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는 김기영의 취향이나 색채가 듬뿍 담겨져 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전에 한 번 언급한 바 있듯, 대체로 빨리 만들수록 자신의 것이 아닌 부분들이 끼어들기 어려울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당시의 젊은 세대들이 죽음에 대해 가지는 어떤 환상과 삶에 대한 의지의 부재들을 꼬집듯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한 여자에게 음료수를 얻어먹었다가 졸지에 그녀의 동반자살 파트너가 되어버린 주인공은, 죽음에서 살아난 이후로 죽음에 대한 묘한 동경을 가진다. 아니 삶에 대한 의지를 잃는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밥을 하루에 여섯 번 먹어도 배가 고프니(그게 전부 라면이라니 가슴이 아프기는 하다), 이제 죽어야겠다라니. 정말 환상적인 이유 아닌가. 어쨌거나 그 이후로 주인공은 죽음을 동경하게 되고, 자실을 막는 이를 죽이고(죽여도 죽지도 않는다), 귀신과 육체적 관계를 맺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편의적이며, 진부하고, 한참 부족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어떤 일관적 시선이라기보다는 기괴하고 뜬금없는 전개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만의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잊는다해도, 죽은 시체의 잘려진 머리가 "난 안 죽어. 의지가 있으면 살 수 있다."를 외치며 칼을 입으로 물고 자신을 죽인 이에 대항하는 것과 같은 압도적 장면들을 잊는 것은 불가능할테니.

2007. 11. Arborday.
by ArborDay | 2007/11/17 11:04 | VHS/DVD/Bluray | 트랙백(1) | 덧글(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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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Cinema Blues at 2008/07/03 07:14

제목 : 김기영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
정말로 이런 '추상적인' 포스터가 붙었었다고?여행지에서 낯선 여인에게 독이 섞인 음료수를 받아마셨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영걸(김정철)은 이후 삶에 대한 의지를 잃고 자살충동에 시달린다. 그런 그에게 연달아 이상한 일이 생긴다. '삶의 의지'를 외치며 죽여도 죽지 않는 노인, 뼈에서 살아난 천 년 전 신라 때의 여인(이화시), 그리고 죽음에의 의지로 충만한 까칠한 미대생(김자옥)과 차례로 만나며 영걸은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자살충동에 시......more

Commented by 비둘기는... at 2007/11/17 12:06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영화제에서 보고 엄청나게 감동한 작품입니다^^ 오!! 우리나라에도 이런 기괴한 작품이 있구나 생각하면서요. 요즘 김기영 감독님의 영화 디빅을 구하는데 이 작품은 쉽지가 않네요...ㅠㅠ 느미, 하녀 구하고 얼마 전에 육식동물까지 구했는데... 요놈 <살인나비를 쫒는 여자>는 힘드네요. 그나저나 회고전도 많이 하고, 여러 유명한 감독이나 평론가들에게 언급도 자주 되는데, dvd는 감감무소식이네요. 김기영 감독 정도면 박스셋으로 하나 나와줘도 될텐데... 소스가 워낙 안 좋은건지, 암튼 아쉽네요.
Commented by 우노히카 at 2007/11/17 12:16
김기영 감독님의 영화는 참 구하기 힘들죠......... DVD도 나와줬으면 하는데. 하녀,육식동물,살인나비를쫒는여자 등등.
윗 분 말 대로 회고전은 자주 열리고 영상자료원에서도 상당히 많이 틀어주는 그의 영화인데 왜 DVD가 안 나오는 건지... 흑흑 슬프기만 합니다.
Commented by biblekim at 2007/11/17 13:18
성경공부,에스라성경강좌
Commented by 천용희 at 2007/11/17 13:57
비디오를 찾아대다가 끝끝내 KO당했던 작품입니다.

진짜 한번 보고 싶은데 미치겠어요......T.T

P.S. 내년에 현제 남아있는 22편의 전작이 김기영전작전으로 공개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기영감독님 DVD가 못 나오는 이유는 판권이 이래저래 공중에 다 떠 있어서 그렇다는군요. 특히 일본으로 건너간 몇편의 영화는 판권자를 찾기도 어려울 수준이라고 합니다.
Commented by 히치하이커 at 2007/11/17 15:39
'의지가 있으면 살 수 있다'란 말이 무척이나 와닿네요. 요즘 꼴이 꼴인지라...
Commented by 피터팬 at 2007/11/17 16:31
"의지다. 의지만 있으면 죽지않는다." 라고 말하던 해골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군요.
멋모르고 닥치는대로 영화를 보던 대학 1학년 때 봤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서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대해 이야기하던 선배의 모습도 떠오르네요.

시간이 지나도 기억이 똑똑히 살아나는 걸 보면 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분명합니다..ㅋ
김자옥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요..^^
Commented by 북극찐빵 at 2007/11/17 18:40
라면을 하루에 여섯번씩 먹다니....굳이 애쓰지 않아도 머지않아 죽을 수 있을 것 같....죄송합니다;; 기괴하고 뜬금없는 전개라니 호기심을 자극합니다만 구해서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군요. EBS에서 김기영감독 특선이라도 해주면 좋겠네요'ㅇ'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1/18 01:36
비둘기는/ 이런 분의 작품조차 dvd로 구할 수 없다는건 참 아쉬운 일임은 틀림없어. 정말 최고인데. ㅠㅠ

우노히카님/ 그래도 자주 틀어주니 다행이라 생각해요. 인기까지 없었다 쳐봐요. ㅠㅠ

biblekim님/ ...

천용희님/ 비디오 찾기는 어렵지 않을텐데요, 가격이 문제지.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1/18 01:38
히치하이커님/ 제 꼴도 비슷하답니다. 하하하.

피터팬님/ 전 꽤 늦게 이 작품을 접했어요. 이래저래 연이 닿지 않았던 작품 중 하나였죠. ^^

북극찐빵님/ 죄송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걸요. 라면 먹으면서 계속 먹어도 배가 고프다고 말하는데 서글펐어요.
EBS와는 언젠가 연이 닿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Commented by 스미스 at 2007/11/18 09:38
아... 동아리실에서 보고 기절할 뻔 했던..;;
섹스 씬에서 뻥튀기 튀어나오는 장면이 압권이죠.
Commented by 천용희 at 2007/11/18 18:44
P.S. 오늘 청계를 갔다왔습니다. 그 많던 비디오가게들은 다 사라졌더군요......

그나마 남아있던 가게들을 뒤져봤지만,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를 구하는데에는 실패했습니다.

대신에 화녀를 구했습니다. 이거 웃어야 해 울어야 해......
Commented by 김응일 at 2007/11/18 23:09
한국영화 DVD를 영상자료원에서 제작하고 있으나.. 이거 원 시장이 너무 안 좋아서.. 신상옥 감독 콜렉션은 조만간 구입할 생각입니다. 흑.. 좋은 영화 많은데 말이죠..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1/19 02:47
스미스님/ 아, 그 장면 압권이죠.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싶었었죠.

천용희님/ 돈만 있으면 이 작품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답니다. 어찌 되었건 구태여 이 작품에 목을 매지 않으신다면, 하녀시리즈가 퀄리티는 더 나은 편이니 울지는 않으셔도 될 듯.

김응일/ 그러게 말이야. 역시 문제는 수요지, 수요.
Commented by 천용희 at 2007/11/19 03:07
영상원 DVD는 실제로 개인 구입자보다는 오히려 도서관이나 학교에서의 구입량이 많죠.

가격도 만원내외수준이라서 일반적인 구입자도 꽤 되는 걸로 압니다.(저도 앵간한 건 사죠. 그런데 최근에 나온 40년대 영화 박스세트는 도저히 못 사겠더군요)

단지 사업이 활발하지 못한 건 기본 투자금 자체가 적어서 그렇다고 합니다......시장의 암담함이여......
Commented by sesism at 2007/11/19 12:53
저는 김기영 감독님 영화에서 '~한다 ' 하고 말하는 거 정말 정말 좋아해요! 특히 이 영화에는 그런 장면도 많은 것 같고(영화를 본 건 아니고 시네마천국 B무비에서 해줬었거든요) 느낌도 매우 그로테스크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이 육식동물에도 나온 사람 같은데, 왠지 공포스럽게 생겼으면서도 약간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뭐 여튼 그 남자배우의 느낌도 좋아해요 :)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1/19 15:35
천용희님/ 후후후, 불티나게 팔리면 투자금이란게 적을 수가 없어요. ㅠㅠ

sesism님/ 힘이 느껴지는 어투잖아요? 고지식함이라거나. 그쵸? 매력있는 말투에요. 저도 좋아합니다.
Commented by 스미스 at 2007/11/19 21:57
sesism/같은 '~한다'라도 <경마장 가는길>에서 문성근의 문어체 대사는 정말 얄밉고 얍삽합니다. ^^
Commented by 풍류도인 at 2007/12/17 00:09
보고 싶은데 볼 방법은 없으니 원 ㅡㅡ!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2/17 13:25
풍류도인/ 영상자료원에서 자주 하더라.
Commented by 풍류도인 at 2007/12/18 15:29
아 그렇구나. 왜 그 방법을 전혀 생각 못 했지. 아아 바보..... ㅡㅡ!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2/18 18:04
풍류도인/ 쿡쿡쿡, 집에서 드라마만 보느라고 그랬구나!
Commented by 풍류도인 at 2007/12/19 02:28
요새는 영화에 대한 열정은 확 줄어든 반면에 드라마에 대한 재미는 급상승 중입니다. 이게 모두 하얀거탑 때문입니다. 볼 만한 드라마가 어찌나 많은지 원...... 허허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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