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사탄

예로부터 나는 애둘러 돌아갈 것 없는 간단명료한 표현을 좋아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 작품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공포영화의 제목으로 사탄 - 물론 원제는 별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 이라니, 이 얼마나 본질에 부합하는 명쾌한 제목이란 말이더냐. 기대와 흥분에 휩싸여 카운터로 들고 가 대여를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난 후 나는 심한 실망에 휩싸였다. 그 이유는 영화가 나빴다거나의 이유가 아니라, 커버에 낚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 장면 언제 나와라고 생각했던 장면이 나오지 않을 때의 실망감이 얼마나 큰지 비디오세대라면 다들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원작을 못 봐서 정확한 삭제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비디오 출시판은 85분, 미국판은 98분이다.)

영화 [사탄]은 남들이 가지 말라는 길 - 가지 말라는 길은 가지 말아야 한다 - 에 진입했다가, 군부대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뱀에 물려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와는 달리 재감상을 했을 때는 그보다 훨씬 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 이유는 저 장면 안나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실제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장마가 끝났던 어느 해 여름, 근교에 나가 볕이라도 쬐야겠다는 생각으로 신촌역에서 기차를 타고 백마로 나들이를 한 적이 있었다. 본격적인 까페촌을 찾아가려면 역으로부터 길고 긴 - 평상시라면 충분히 걸을만한 길이다 - 길을 걸어야 했는데, 이거 웬걸. 아스팔트에 수없이 많은 지렁이떼가 나와 말라 죽어 있는 것이었다. 정말 수없이 많은 지렁이떼. 게다가 그 중의 일부는 살아 꾸물대고 있었다. 10미터도 못 가 입에서는 말이 사라지고, 까치발을 하고 필사적으로 그 길을 지나가야 했던 실로 말로 할 수 없는 그 공포. 영화의 초반부 도로에 나온 수없이 많은 뱀을 깔아뭉개고 차가 달리던 장면에서 그 느낌이 생생해졌다. 당연하게도 사람은 겪은만큼 느끼게 되는 것이다.

2007. 11. Arborday

by ArborDay | 2007/11/15 16:02 | 호러비디오 | 트랙백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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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비둘기는... at 2007/11/15 16:07
여기 오면 제가 안 본 공포영화가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어린 시절 동네 비디오가게 공포영화는 모조리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작은 동네라 비디오가게가 크지 않았지만요) 안 본게 정말 많네요. 무엇보다 "커버에 낚였다" 이건 그 시절 공포영화 비디오테이프의 공식이지 않을까 싶어요....ㅎㅎ 정말 대단한(?) 그리고 속임수 같은 커버가 많았죠. dvd도 저렇게 표지가 나오면 참 좋을텐데, 요즘 dvd 표지는 참으로 얌전한 것 같아요. 요런 막나가는 커버 구경하기가 무척 힘들다는...
Commented by 겜퍼군 at 2007/11/15 16:45
으.. .생각만해도 무섭삼.. 지렁이 ㅡㅡㅋ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1/15 17:55
비둘기는/ 심플함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dvd 커버는 너무 심심해. ^^

겜퍼군님/ 다시 생각해도 무섭습니다. 지렁이!
Commented by 리채틴 at 2007/11/16 02:59
지렁이 일화를 보니..제 경험도 떠오르네요. 전 송충이였어요. 비처럼 쏟아지는 송충이...이것도 공포 영화에서 소재로 쓸 수 있지 않을까요?^^
Commented by sesism at 2007/11/16 11:41
저도 비디오세대인지 공감이 가는 얘기예요. 커버에선 분명히 봤는데 영화에선 안나오면 이거 다른 영화 장면 갔다놨나 생각도 들곤 했어요. 그런데 그 지렁이라니, 정말 겁나네요. 저라면 소리 빽빽 지르고는 못 지나갔을 거예요.
Commented by 신어지 at 2007/11/16 11:44
"당연하게도 사람은 겪은만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 당연하게도.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1/16 15:09
리채틴님/ 이태리 호러영화 중 한 장면.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비가 아니라 구더기들.
정말 끔찍한 장면이죠? 그걸 송충이로 바꾸면 초호화찬란 끔찍이겠어요. ^^

sesism님/ 저도 혼자서라면 못 지나갔을걸요. ^^

신어지님/ 옙, 많이 겪고 살아야겠습니다.
Commented by 제목없음 at 2007/11/23 15:20
이 시대의 표지+제목 낚시는 역시 대단했군요
ㅇ>-<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1/23 20:41
제목없음님/ 솔직히 고백하자면 비디오커버의 또다른 재미는 낚시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Commented by 필유 at 2007/12/05 21:15
이 영화 저도 비디오로 봤습니다-_-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서도, 공포가 예상에 못 미쳤던 게 기억나네요;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2/07 14:46
필유님/ 예, 확실히 무서운 영화는 아니었어요.
Commented by 풍류도인 at 2007/12/19 02:30
제목이 조금 구닥다리 같네요. 보려고 하다가도 제목 때문에 그냥 외면할 것 같아요.
Commented by dellamorte at 2007/12/24 20:01
무섭진 않았고, Uncut 판본도 썩 훌룡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Screaming Mad George의 특수 효과가 괜찮았던
작품중의 하나입니다. :-) Brian Yuzna의 Society와 함께 Screaming Mad George의 대표작중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이죠. Robert Englund가 주연했던 Freddy Krueger판 The Phantom of Opea인 "영원한 사랑"과
"The Stepfather" 1편에 출연했던 Jill Schoelen의 풋풋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네요.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2/24 23:14
dellamorte님/ 비디오판으로는 그 특수효과를 확인하기가 어렵다죠. ㅠㅠ
[스텝파더]에서는 솔직히 피터오퀸만 기억에 남네요. 엄청난 연기력!!
Commented by 헬몬트 at 2008/03/29 18:29
이거 극장 개봉까지 하셨죠 ㅡ ㅡ..지금은 문닫고 건물마저도 사라지고 없는 부천 소사극장에서 걸려있던 포스터 생각납니다.
Commented by 응한 at 2008/07/23 11:16
저는 이 영화 극장에서 봤는데, 차에서 남자가 여자의 다리를 쳐다볼 때...
왠지 저도... 공포영화라는 것을 망각하고 여자의 다리에 시선이... -_-;;
무서웠다는 기억은 없고... 여자 다리만 생각나네요;;;
Commented by ArborDay at 2008/07/23 12:11
응한님 역시 다리를 좋아하시는군요. 전 [그라인드 하우스] 보다가 그 늘씬한 다리들에 넋이 나갈 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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