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31일
배트맨2
1. 영웅에 대한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나는 보통 두 편의 영화를 든다. 한 편은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을 맡았던 [리틀 빅 히어로]이고, 다른 한 편은 팀버튼의 [배트맨2]이다. 전자가 우연히 영웅이 된 (사실은 별 것 없는 결함투성이의) 보통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면, 후자는 그보다 더 복잡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공통점은 둘 모두 미디어와 영웅과의 관계를 담고 있다는 것. 오늘날의 사람들이 영웅을 원하는 이유는 이런게 아닐까 싶다. 심심한 삶에서의 대리만족. 아직도 세상에는 저런 사람이 살고 있구나라는 아주 조그마한 위안을 얻기 위해서. 물론 미디어가 없이는 영웅도 없다.
2. 나는 외계에서 왔거나, 초능력자거나, 그도 아니면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과학에 의해 태어난 히어로보다 배트맨 쪽에 훨씬 정이 간다. 물론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을테지만, 적어도 그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꺼낼 때마다 자본으로 무장된 히어로를 보는 것이 불편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고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색안경을 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그토록 요구하던 가진 자의 의무를 나름대로 이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3. [배트맨2]는 기본적으로 자본 대 자본, 즉 착한 자본과 악한 자본의 대결이다. 펭귄과 캣우먼이 설치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이 막스 슈렉이니까. 그러니까 [배트맨2]가 그리는 세상은 착한 자본과 악한 자본이 서로 대립하고, 소외된 자들이 분노를 발산하는 그런 곳이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4각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경의를 표한다. 고담이 악의 도시라고? 천만에, 착한 자본가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기 어려운 오늘날의 대한민국보다 선한 곳인지도 모른다. 아차, 이 곳에서도 착한 자들은 가면을 쓰고 베일에 가린 채 활동하고 있으려나? 그렇게 믿어보자. 시니컬해봐야 머리만 아프다.
4. 펭귄맨은 밋밋해진 주인공 배트맨(영화의 처음에 나오는 것은 펭귄맨,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캣우먼이다)과는 달리 흡사 영웅신화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범상치 않은 출생, 고난, 극복, 승리. 그러한 영웅신화는 현대에 들어 조금 변질되는데, 고난을 극복하고 비상하는 과정은 영웅의 뛰어난 지략이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자본과의 협잡과 미디어와의 동거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피엔딩도 없어서 결국 욕망은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태어났을 때 그가 버려진 곳과,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추락하던 곳이 같은 곳이라는 사실은 보는 이를 참으로 씁쓸하게 만든다. 여전히 유아틱한 상태로 머물러버린 펭귄맨은 동정을 자극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다.
5.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캣우먼이다. (미쉘 파이퍼는 내게 언제나 캣우먼이었고, 앞으로도 캣우먼일 것이다.) 그녀가 고양이들의 도움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후 집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하는 짓은, 그녀를 여성답게 만들었던 모든 것 - 이를테면 인형이나, 액자, 예쁜 인테리어 등 - 을 파괴하는 일이다. 전화응답기에 저장된 광고 - 사랑받는 여직원이 되기 위해 고담향수를 사세요 - 를 듣자마자 그녀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고담향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주변을 예쁘게 두었던 취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로부터 강요되었던 여성상이었을까. 어찌 되었거나 순진하고 맹한 여인으로부터 SM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만한 도발적 이미지로의 급격한 전환, 이는 영화에서나 만날 수 있을 짜릿한 변신이다.
6. 한 장면. 캣우먼이 되기 전 셀리나가 배트맨에 의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때 셀리나는 배트맨에게 말을 걸지만, 배트맨은 워낙 바쁜지라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스쳐간다. 셀리나가 하는 말, "당신도 똑같아요. 남자들이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녀를 그냥 지나쳐버린 브루스 웨인이, 셀리나와 다시 재회했을 때 그녀에게 한 눈에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셀리나는 어제까지의 셀리나가 아니다. 여기서 시사점. 남자들도 순종적인 여자보다는 당당한 여자를 좋아한다.
7. 이 당당한 여인은 더 이상 사랑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실 이중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비밀을 공유한 캣우먼과 배트맨이야말로 진정한 커플이 될 수 있었건만(가면무도회장에서 그들만 가면을 쓰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맨얼굴조차도 그들에게 가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때로는 우리도 그렇다). 가능하다면 스크린에서 배트맨과 캣우먼의 관계들을 더 보고 싶기도 하다.
동시에 캣우먼은 여성의 약진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당당하고 도발적이며 남성이 만든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캐리어 우먼. 배트맨, 슈렉, 펭귄맨은 모두 그녀를 죽이고 또 죽인다. 하지만 계속해서 죽이고 죽여도 살아남아 끈질기게 그녀는 자신의 의도를 완성한다.
8. 여지껏 배트맨 시리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말하라면, 늘 1편과 2편을 고민해왔었다. 물론 2편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1편의 조커의 매력에 현혹되어 쉽게 답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두 편을 연속으로 감상한 지금은 확실하게 2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크리스천 베일의 배트맨을 보고 난 이후 다시 만난 배트맨 1편에서는 "뭐야, 다리가 왜 저렇게 짧아."라고 수도 없이 투덜거렸지만, 2편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2007. 10. Arborday.
2. 나는 외계에서 왔거나, 초능력자거나, 그도 아니면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과학에 의해 태어난 히어로보다 배트맨 쪽에 훨씬 정이 간다. 물론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을테지만, 적어도 그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꺼낼 때마다 자본으로 무장된 히어로를 보는 것이 불편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고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색안경을 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그토록 요구하던 가진 자의 의무를 나름대로 이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3. [배트맨2]는 기본적으로 자본 대 자본, 즉 착한 자본과 악한 자본의 대결이다. 펭귄과 캣우먼이 설치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이 막스 슈렉이니까. 그러니까 [배트맨2]가 그리는 세상은 착한 자본과 악한 자본이 서로 대립하고, 소외된 자들이 분노를 발산하는 그런 곳이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4각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경의를 표한다. 고담이 악의 도시라고? 천만에, 착한 자본가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기 어려운 오늘날의 대한민국보다 선한 곳인지도 모른다. 아차, 이 곳에서도 착한 자들은 가면을 쓰고 베일에 가린 채 활동하고 있으려나? 그렇게 믿어보자. 시니컬해봐야 머리만 아프다.
4. 펭귄맨은 밋밋해진 주인공 배트맨(영화의 처음에 나오는 것은 펭귄맨,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캣우먼이다)과는 달리 흡사 영웅신화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범상치 않은 출생, 고난, 극복, 승리. 그러한 영웅신화는 현대에 들어 조금 변질되는데, 고난을 극복하고 비상하는 과정은 영웅의 뛰어난 지략이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자본과의 협잡과 미디어와의 동거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해피엔딩도 없어서 결국 욕망은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태어났을 때 그가 버려진 곳과,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추락하던 곳이 같은 곳이라는 사실은 보는 이를 참으로 씁쓸하게 만든다. 여전히 유아틱한 상태로 머물러버린 펭귄맨은 동정을 자극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다.
5.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캣우먼이다. (미쉘 파이퍼는 내게 언제나 캣우먼이었고, 앞으로도 캣우먼일 것이다.) 그녀가 고양이들의 도움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후 집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하는 짓은, 그녀를 여성답게 만들었던 모든 것 - 이를테면 인형이나, 액자, 예쁜 인테리어 등 - 을 파괴하는 일이다. 전화응답기에 저장된 광고 - 사랑받는 여직원이 되기 위해 고담향수를 사세요 - 를 듣자마자 그녀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고담향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주변을 예쁘게 두었던 취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로부터 강요되었던 여성상이었을까. 어찌 되었거나 순진하고 맹한 여인으로부터 SM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만한 도발적 이미지로의 급격한 전환, 이는 영화에서나 만날 수 있을 짜릿한 변신이다.
6. 한 장면. 캣우먼이 되기 전 셀리나가 배트맨에 의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때 셀리나는 배트맨에게 말을 걸지만, 배트맨은 워낙 바쁜지라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스쳐간다. 셀리나가 하는 말, "당신도 똑같아요. 남자들이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녀를 그냥 지나쳐버린 브루스 웨인이, 셀리나와 다시 재회했을 때 그녀에게 한 눈에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셀리나는 어제까지의 셀리나가 아니다. 여기서 시사점. 남자들도 순종적인 여자보다는 당당한 여자를 좋아한다.
7. 이 당당한 여인은 더 이상 사랑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실 이중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비밀을 공유한 캣우먼과 배트맨이야말로 진정한 커플이 될 수 있었건만(가면무도회장에서 그들만 가면을 쓰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맨얼굴조차도 그들에게 가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때로는 우리도 그렇다). 가능하다면 스크린에서 배트맨과 캣우먼의 관계들을 더 보고 싶기도 하다.
동시에 캣우먼은 여성의 약진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당당하고 도발적이며 남성이 만든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캐리어 우먼. 배트맨, 슈렉, 펭귄맨은 모두 그녀를 죽이고 또 죽인다. 하지만 계속해서 죽이고 죽여도 살아남아 끈질기게 그녀는 자신의 의도를 완성한다.
8. 여지껏 배트맨 시리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말하라면, 늘 1편과 2편을 고민해왔었다. 물론 2편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1편의 조커의 매력에 현혹되어 쉽게 답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두 편을 연속으로 감상한 지금은 확실하게 2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크리스천 베일의 배트맨을 보고 난 이후 다시 만난 배트맨 1편에서는 "뭐야, 다리가 왜 저렇게 짧아."라고 수도 없이 투덜거렸지만, 2편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2007. 10. Arborday.
# by | 2007/10/31 16:40 | 영화잡담 | 트랙백 | 덧글(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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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버튼의 <배트맨>이 코믹스의 분위기를 나름 잘 계승하면서 경쾌하면서도 암울한 느낌을 주었다면..(사실 배트맨 자체가 워낙 어두운 이미지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마치 범죄물 혹은 약간의 호러영화 같은 느낌까지 받았었지요. 어쨌든 <배트맨>은 워낙 소재가 좋아서 개성이 강한 감독이 여러번 리메이크 해도 계속 다른 색을 보여 줄 좋은 원작을 지닌 히어로물인 듯.
캣 우먼은 역시 미쉘 파이퍼..^^
당시에 팀 버튼 감독이 미셸 파이퍼와 <캣우먼>을 만들 계획이었는데 결국 틀어지고 말았죠.
참 근사하고도 특별한 히어로물이 나올 수 있었는데 말이죠.
배트맨 비긴즈가 괜히 이 제목을 따라한 듯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팀 버튼 감독이 "내 최고작이 될 듯"이라고 호언장담한 [스위니 토드]가 무진장 기대됩니다, 크흐.
특히 고담시티에 대한 글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덧글: 어리숙한 스파이더맨이 요즘엔 더 정이 가더군요 ㅠ.ㅜ)
無없님/ 예, 맞습니다. 그녀가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였다는데 반론이 있기가 어려워요.
문화파괴님/ 영화적으로도 [배트맨2]가 더 좋았답니다
dcdc님/ 그럼요, 그들의 과거와 변신. 정말 멋지지 않아요?
몽중인님/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런 프로젝트가 틀어져버리면 정말 잠도 안 온다구요.
천용희님/ 예, 가장 슬프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묘하며 가장 재미있는 배트맨입니다.
krzys님/ 전 고민 좀 해봐야겠어요. [에드우드]가 있어서. ^^
argon님/ 그 댓글 나올거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캣우먼은 무조건 파이퍼죠.
WindFish님/ 감사합니다. ^^
shuai님/ 하핫, 최고의 칭찬이네요. 감사드립니다. [리틀 빅 히어로]는 많은 이들의 입에 그리 자주 오르내리지는 않지만, 정말 수작입니다. 어떤 짓을 해도 밉지 않은 더스틴 호프만이 있었기에 더욱 매력적인 작품이었겠지요.
디아나님/ 옙, 그의 영화들은 음울한 동화의 회색빛 삽화를 연상시켜요. 하지만 톡 쏘는 맛이 있죠. 어찌보면 냉소적인건데, 유머러스해요.
Ruii님/ [스파이더맨]도 매력적이죠. 소시민이라 내게 더 가깝기도 하고. 하지만 여전히 제게는 배트맨이 최고네요.
실사로 가장 완벽한 이미지의 캣우먼을 구현화한 미셀 파이퍼 여사의 매력덕에 좋기는한데, 이 이후 팀버튼이 더 이상 배트맨 실사판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때문에 좀...(원작 팬들사이에서 많이 까이는 팀버튼판 배트맨이긴 합니다만 그 매력적인 세계관과 설정탓에 작가들쪽에서 이 작품의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는거 같더군요)
"미셀 파이퍼는 내게 언제나 캣우먼이었고, 앞으로도 캣우먼일 것이다."
저두 한 동안 그렇게 믿고 살았는데, <스타더스트>의 마녀 연기하는 미셀 파이퍼를 보고 전향해 버렸습니다. 아마 보셨으리라 믿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캣우먼의 미셀 파이퍼가 더 좋으신지?? ^^
p.s 할 베리의 캣우먼은 영....ㅡㅡ
제목없음님/ 원작은 안 봐서 몰라요. 영화는 더 할 나위없이 좋은데. ^^
SupersoniC님/ 아, 오랫만이에요. 반갑습니다.
전 [스타더스트]를 못 봤어요. 이런 리플을 보고서 영화를 아니 볼 수는 없겠네요. 대답은 차후에. ^^
전 조커에 한 표. 물론 캣우먼도 좋았습니다.
음..스판덱스 영웅중에서 배트맨은 좋기도 하지만 전 어쨌든 스파이더 맨입니다. 유머러스해서...브루스 웨인씨는 너무 심각해요.
마지막 부분 공감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