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따위 없었으면 좋겠어.

명절이면 흔히 듣게 되는 말이면서, 나이가 들수록 점차 공감하게 되는 말이 있다. "명절따위 없었으면 좋겠어."
빨간 날이니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선물거리가 뭐가 있을까를 머리에 쥐나도록 고민한 뒤 두 번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백화점 - 뭐가 좋다고 지겨워서 때려친 전 직장을 기웃거리겠나 - 에 들러 돈쓰고 사람에 치이는 끔찍한 고생을 하다가, 차들이 꼼짝조차 하지 않는 도로에서 몇 시간 시달린 후, 사랑하는 그러나 일년에 몇 번 보지 못하는 가족들(일부는 친척)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라도 하려하면 그 인사가 마치기 전부터 시작되는 잔소리.

민방위 훈련을 시작하고도 아직 정식 직장이 없으며, 결혼은 하지 않았고, 따라서(경우에 따라 어떤 관계도 없을 수 있음을 인지한다) 손주도 안겨드리지 못한 장남인지라 집에 들르면 욕을 먹을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본인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만, 그렇다고 내가 마냥 놀고 있는 것만도 아니고, 융통성이 없어 해외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뻥을 쳐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지도 못하는 배짱없음에 좌절할 때도 있지만 어쨌거나 이번 학기가 지나면 개나 소나 딴다는 그러나 은근히 흔하지 않은 XX 수료라는 명칭을 달게 되며, 결혼을 할 여인네가 없는 것도 아니고, 남성의 능력을 상실한 것도 아니거늘 마음 한 구석에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은 한 번씩 하는 말이라 덜 지겨운지 모르겠지만, 듣는 사람 생각도 좀 해주시라. 아니면 좀 신선한 이야기를 하던가. 내가 이럴진대 정말 애인없고, 당분간 결혼 계획 없으며, 마땅한 직장 없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게다가 여자라면. 결혼 안 한 나이 삼십의 딸은 우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던데. 젠장.

어쨌거나 하루이틀 겪은 일도 아니고 이제는 대처도 제법 능숙해진지라 - 아버지 연세가 적지 않으신 탓에 꽤 오래전부터 시달려왔다. 능숙해짐과는 별개로 점점 참기 어려워진다. 일종의 원죄의식으로 형성된 것 같기도 하고. - 자신감 있는 말투로 (나도 모르는 나의) 미래에 대한 장미빛 구라를 한껏 늘어놓다가, 주는 음식 받아먹고, 술잔 몇 번 부딪히고, 고스톱판을 기웃거리면서 용돈이나 좀 벌면 어쨌든 나의 명절은 대충 끝난다. 나야 적당 수준의 잔소리만 참아내면 되는 것이다. 반면 내 나이또래의 비슷한 여인들은 잔소리도 나보다 더 심하게 들을테고, 일도 해야하니 이 얼마나 짜증스런 명절이겠는가. 이 땅의 여성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뉴스를 보니 이번 추석에 외국에 나가는 사람들 참 많다던데,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다.

어쨌거나 남들 하는건 해야 마음이 놓이는 지극히 평범한 성격을 가진지라, 집에도 다녀왔고, 의무방어전을 마친 후 잠도 늘어지게 잤고, 영화도 몇 편 봤고, 책도 몇 권 읽었다. 그다지 유쾌한 명절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빨간 날이 몇 개 겹쳐 있었어서 그런건지, 후유증도 겪고 있다. 지금 듣는 잔소리들이 사라진다 해도, 내년 역시 이럴게다. 아마 새로운 갈등들이 생겨나겠지. 어휴. 이건 정말 진심인데 명절따위 없었으면 좋겠다.

by ArborDay | 2007/09/27 12:53 | 일상/기타 | 트랙백 | 덧글(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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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산왕 at 2007/09/27 13:29
명절에 집에안간지 5년 넘었군요; 명절에 듣던 잔소리를 사시사철 집에만 가면 듣게 되니 그냥 명절에 몰아 듣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orz
Commented by 니와 at 2007/09/27 14:24
확실히 명절의 본래 의미가 너무 변질되버려서..
Commented by tamguman at 2007/09/27 14:26
맞아요. 명절 따위 없었으면 좋겠어요. 해마다 늘어가는 잔소리! 때문에 미치겠답니다. 으헉...
Commented by 대마왕 at 2007/09/27 14:52
저도 반복되는 그게 싫어서 그냥 회사 가서 일이나 했습니다.
Commented by cain at 2007/09/27 15:15
오래 듣다보니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게 되더군요. 하시는 분들도 지쳤는지 예전보다 빈도도 줄어든 것 같고요. =ㅁ=
Commented by sallie at 2007/09/27 15:51
우환이군요..... -_-; (하긴 사실이에요.) 일하느라 바빠서 명절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서 다행입니다.
Commented by 겜퍼군 at 2007/09/27 16:06
음 나이들면 참 무섭죠. 명절이.. 뭐 저는 집에서 거의 포기상태인지라. 뭐랄까 무덤덤히 넘어가지만... 그래도 역시 명절은 꾸리하죠. 음 시내돌아다니니 왜이리도 커플들이 많은건지 ㅡㅡㅋ 제길 다들 추석인데 가족과 보내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플스방을 가니 죄다 남자에 그 비좁은공간에서 서로 살을 맞대며 소리지르며 위닝을 하더군요. 그런 와중에도 모두의골프를 완전히 포개져서(정말로)하는 커플시마가 있더군요.. 제길 제대로 염장질.. ㅡㅡㅋ 아니 의자는 앉아서 겜하라고 잇는건지 누워서 하라고 만든게 아니거를.. 제대로 염장이더군요 ㅡㅡㅋ
Commented by 천용희 at 2007/09/27 19:41
이번에는 서울에서 죽도록 남았습니다. 감기도 걸리고 계획도 무너졌지만, 그래도 그게 낫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큰 집인 옥천 내려갔으면 100%싸움이 났을 거니까요. 군 전역이후 두번의 명절동안 전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번에 갔으면 분명 싸웠을 게 뻔하기에 안 내려 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betty at 2007/09/27 21:06
한사람..한사람..이야기를 듣다보면 (제 주위에 그런사람만 있는지 몰라도^^;;)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명절은 왜 있는건지..
얼마먹지 나이임에도 이제 그 의무방어전에도 슬슬 신물이 나갑니다..
Commented by reme19 at 2007/09/27 22:32
살찌면 왜 살쪘냐, 살빠지면 왜 그리 말랐냐, 애인 없으면 왜 애인 없냐, 애인 있으면 결혼은 왜 안 하냐, 결혼하면 애는 왜 아직 안 낳냐, 애 낳으면 둘째는 언제 낳을 거야, 애들이 공부를 못하면 애들이 공부 못한다며? 어떡해.. 등등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아요. 아.. 오지랖들 하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9/27 22:36
산왕님/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평일에는 부모님에게만 듣는 것이니까 견딜만 하지 않을까 상상중입니다. ㅠㅠ

니와님/ 하하하, 원래 의미 따위 몰라요. ^^

tamguman님/ 거의 한계상황에 직면하셨군요. 저도 그래요. 니나노~

대마왕님/ 하하하, 전 갈 회사도 없답니다. ㅠㅠ

cain님/ 엇, 그게 됩니까? 제 성격이 결코 좋은 편이 아니군요. ㅠㅠ
Commented by yosuda at 2007/09/27 22:37
취직을 했더니 이번 추석은 무난히 넘어갔습니다.
이걸로 한 몇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생각중이에요.
뭐..벌써부터 결혼하란 얘긴 안하실테고 말이죠.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9/27 22:41
sallie님/ 예전에 모 드라마에서 들었던 대사인데, 씁쓸해서 그랬는지 재미있어서 그랬는지 여태 기억하고 있네요. 그런데 정말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들 하시는 것 같아요. ㅠㅠ

겜퍼군님/ 시내에서 명절을 보내셨군요. 친지를 피해 연애를 즐기는 연인들도 꽤 많은가봅니다. ^^
전 플스방은 단 한 번도 못 가봤답니다. 그래서 상상만 하는 중.

천용희님/ 안 가셨군요. 싸우느니 집에 있는게 낫죠, 뭐. 명절은 싸우는 날 같기도 합니다. ㅠㅠ

betty님/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명절. 맞습니다. 나이가 그런 때라 그런지 명절 좋아하는 친구들, 거의 없더군요. ㅠㅠ

reme19님/ 그 놈의 오지랖들, 결코 끝나지 않겠군요. 결혼 하시고 두 번째 맞이하시는 명절이었던가요? ^^ (기억이 가물가물)

yosuda님/ 하하하, 당분간 마음이 좀 편하시겠어요. 직장 생활은 어떠신지 잘 모르겠네요. 늘 건강하시기를. ^^
Commented by Azreal at 2007/09/27 23:10
그래서 이번 명절에는 친구들 만나 당구만 잔뜩 쳤네요. 아예 지갑을 안 가지고 나가니까 정신력으로 이기게 되더군요.:D
Commented by oldman at 2007/09/27 23:52
취직해도 더 심한 결혼의 압박이 있습니다. 저는 혼처도 없는지라 그 강도가 장난이 아닙죠...ㅠㅠ
Commented by newt at 2007/09/28 00:19
서른이 코앞인 이 시점에서 말이죠.. 우환이라는 저 단어가 어쩜 그리 크게 보이는지.. 우엥.. ㅋ
Commented by 새침떼기 at 2007/09/28 01:32
이런 글을 보면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인가 봅니다.
제 부모님은 그냥 너 좋은대로 살아라.. 주의신지라..^^;
Commented by 피터팬 at 2007/09/28 02:47
그러니까, 이 땅에 사는 비슷한 연배의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명절에 대해 느끼는 건 역시 비슷하군요..'-'
Commented by nadia at 2007/09/28 03:45
애기 있어도 명절은 힘들겠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 가족은 서울의 호텔에서 1박했다는............)
Commented by 제목없음 at 2007/09/28 18:23
학생시절엔 걍 명절 없으면 좋겠다 무뇌스럽게 말했습니다만 백수공익이 된 이후에는 정말로 쉴수 있는 공휴일과 명절을 찾게 되더군요. 명절준비란걸 딱히 안하는 집안(현재 사정이 그렇습니다)인지라 개인적으로 이번 추석 같은 경우는 오히려 만족이었습니다. 물론 고질적인 문제인 명절준비 등등에 여성만 동원된다든가 하는 문제도 있으니 일방적으로 없어져야 한다거나 할수도 없는 문제라 참 골치아프죠
Commented by 히치하이커 at 2007/09/28 18:39
고렇지요. 명절 따윈 없어도 됩니다!!
다만 달력에 빨간 날은 그대로였으면 합니다. -_-;;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9/28 21:18
Azreal님/ 당구는 멘탈 스포츠입니다. 암요. ^^

oldman님/ 결혼을 하면 자녀, 자녀가 생기면 양육, 기타 등등등. (일테죠? ^^)

newt/ 사실 자식은 원래 우환인건지도 몰라.

새침떼기님/ 사실 제 부모님도 큰 박해(?)는 아니하시지만, 작은 아버지 이하 기타 등등등이. ㅠㅠ

피터팬님/ 그럴 수 밖에 없을거에요. 사람 사는 것 대동소이하지 않겠어요? 파이팅!!!

nadia님/ 헛, 괜찮은 호텔이었나요?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돈만 있다면!!

제목없음님/ 헛. 제가 무뇌스럽다는 말씀? ^^
명절이 있는건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겠죠. 요즘 들어 짜증스러운 일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히치하이커님/ 물론입니다. 빨간 날은 그대로여야 합니다!!
Commented by 제목없음 at 2007/10/05 17:59
헉 무뇌는 접니다 오해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OTL(사죄큰절)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0/06 14:46
제목없음님/ 에이, 자학하지 마세요. 게다가 전혀 오해 안했답니다. 하루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Commented by 풍류도인 at 2007/10/12 22:06
헉 형님 위험한 발언을! 형 그러면 직장 가지신 분들에게 원망 듣습니다. ㅎㅎ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0/13 19:22
풍류도인/ 뭐,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
Commented by seimei at 2008/01/27 10:55
저 결혼 안한 나이 삼십의 딸인데요.ㅠㅠ
그럼 부모님은 나 없을 때 나를 우환이라 부른단 말인가!!!!!!

근데 사실 요즘은 그렇지도 안나봐요 ㅎㅎ
Commented by ArborDay at 2008/01/27 14:47
seimei님/ 예, 확실히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
Commented by au\\\\\\명절 44 at 2008/09/15 19:49
명절 이런거 없어져야 합니다. 국민들 모두 이게 모하는 겁니까..너무 형식적이고 고생해서 오고 가면 듣기 싫은 소리나 듣고 아휴 걍 평범한 연휴나 만들어 주지.....입에서 욕나오는 참으며 여기 까지......
Commented by ArborDay at 2008/09/16 16:06
말해 무엇합니까. 정말 없었으면 좋겠어요. 나름 적응했다 싶었는데, 올해는 유난히 힘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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