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학교로 가려던 차에 한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오신다. 헛기침을 한 번 하시고, 흠흠. 그러고는 물으신다.
"젊은이, 신설동 가려면 어떻게 타야되는건가?"
지하철 환승역에서 길 물어보는 어르신들을 만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지만, 이번은 다르다. 생김새나 말씀하는 투가 내 아버지와 너무 비슷하시다. 가만 생각해본다. 아버지도 지하철 이제는 못 타실텐데.
"여기서 타시고 두 정거장 뒤에 내리셔서 한 번 더 물어보시고 가세요."
"고맙네."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시려는 듯, 돌아서서 걸어가신다. 마음이 놓일리 없다. 나는 할아버지를 조심스럽게 쫓아간다. 할아버지가 앉으신 맞은 편에 앉는다. 아니나 다를까, 앉으신 이후로 계속 안절부절이다.
"할아버지, 여기서 내리셔서 1호선을 갈아타셔야 돼요. 내리시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꼭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어나신다.
"고맙네."
잠시간 서 계시다가 내리신다.

멀어져가는 할아버지의 등을 본다. 진절머리나게 상투적인 생각들이 뻗쳐나가기 시작한다. 이젠 쪼그라들은 저 등. 누구를 키우기 위해 저리 되었을까. 지금은 어디로 가고 계실까. 대접은 제대로 받고 계실까나. 늙었다고 무시나 안 받으면 다행이려나, 요즘 같은 세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가 볼까 두렵지만. 그러나 아버지께 전화를 하지는 않는다. 내 목소리에 이 놈 맘고생 심한가보다 하실까봐서. 30을 훌쩍 넘기고도 아직껏 아버지께 용돈도 못 드리는 불효막심한 녀석은 전화 한 통 드리려고 해도 신경 쓰이는게 너무 많다. 날로 조금씩 더 불효자가 되는 기분이다.

by ArborDay | 2007/08/04 14:11 | 일상/기타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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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08/04 14:3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雅人知吾 at 2007/08/04 15:00
참 공감가는 글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정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같이 보낸 시간도 어머니보다 훨씬 적은데 어디서 생기는 걸까요.
Commented by 사은 at 2007/08/04 16:26
부모님은 공기같이 여겨지다가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다가 고맙고 미안하기만 한 분들로만 떠오르는, 코끝에 찡하게 맺히는 이름으로 갈수록 변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특히나 도움이 못되서 미안한 마음 뿐인데 ArborDay님 글을 읽고 한층 더 그 마음이 진해지네요.
Commented by 아우라 at 2007/08/04 20:35
마치 불효를 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억지스런 생각까지 듭니다.
아버지....그냥 항상 맘뿐이네요.
Commented at 2007/08/05 01:5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천용희 at 2007/08/05 10:49
지금 옆에 어머니가 계시는데도......불효만 하네요......

반성됩니다만......또 불효를 하게 되겠죠......효도를 한번 해드려야 하는데......
Commented by 돼지콜레라 at 2007/08/05 11:47
제가 그만큼 큰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아버지께서 작아지신 건지, 요새는 그저 그 뒷모습을 보기만 해도 안타까운 한편 가슴이 욱신거립니다.
Commented by 베티 at 2007/08/05 15:19
옛날엔 무조건 엄마편이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왜 그렇게 '아버지' 뒷모습은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8/05 16:38
비공개님/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링크를 걸고 들락날락해야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雅人知吾님/ 그러고보면 아버지에게서 애정 고백(?)을 듣는 것도 흔치 않은 경험일텐데요. ^^

사은님/ 부모님과 떨어져 살기 시작하면서, 애틋함이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함께 있을 때는 속도 참 많이 썩였고, 이것저것 참 잘 안 맞는다 생각도 많이 했었는데.

아우라님/ 비슷합니다. 저도 그런 생각할 때가 많아요. ㅠㅠ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8/05 16:41
비공개/ 그렇게 하는게 좋겠어. 그나저나 오랫만이구나. 연애 잘 하고 있니? ^^

천용희님/ 마음이 있으면 언젠가 행동으로 따르지 않을까요? 기운내세요.

돼지콜레라님/ 아버지의 뒷모습에는 성인남자를 울리고 마는 마력이 있어요. ㅠㅠ

베티님/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뒷모습은 점점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에는 엄마를 몇 배 쯤은 더 좋아했었던 것 같은데.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머니가 최고일까요? ^^
Commented by 이끼 at 2007/08/07 08:21
아... 불효자는 웁니다. ;ㅅ;
효도해야지요 효도...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8/07 10:13
이끼님/ 예, 합시다. 울지말구요. 화이팅!!
Commented by seimei at 2008/01/20 22:19
백수된 불효녀도 눈물을..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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