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발표를 하나 마친 후, 집에 들어왔다. 24시간 훨씬 이상을 눈을 붙이지 못한지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조금 귀찮더라도 숙면을 취하기 위해 흘린 땀을 닦아내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정말 지쳐쓰러지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두 개의 리모콘을 들고 침대에 누워 채널을 서너번 돌리다가...

기억이 없다. 잠들었다.

정말 죽은 것처럼 잠들었나보다. 생각보다 오래 잔 것 같지는 않은데, 깨서 보니 내 모습이 가관이다. (정확히는 가관이었을 것 같다. 거울을 보거나 한 것은 아니니까.) 안경도 벗지 않고 잠에 들어, 안경은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르며 코 끝에 겨우 걸려있고, 리모콘은 하나는 오른쪽에 내 하나는 왼쪽에 던져져 있다. 진짜 피곤했구나. 일어나서 무의식적으로(몇 시인지도 볼 겸) 핸드폰을 확인한다. 부재중 전화는 없다.

막 흐리멍텅한 정신을 떨쳐냈을 때쯤,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오빠, 잘 잤어? 아까 전화했더니 정신이 없던걸?" 그러면서 웃는다. 굉장히 재미있는 통화를 했다는 듯이. 어라? 난 전화를 받은 기억이 없는데. 잠깐의 전화를 마치고, 나는 그녀가 언제 내게 전화를 했는지 확인하려고 핸드폰의 최근 기록을 본다. 그!런!데!

지금 걸려온 여자친구의 전화와, 아까 전화했다던 그 시간 사이에 무려 세 건의 전화 - 왜 하필 이럴 때 - 가 더 있다. 겁이 난다. 대체 무슨 소리들을 했을까. 그 중 하나는 나도 누구인지 모르는 번호다.

by ArborDay | 2007/06/12 15:43 | 일상/기타 | 트랙백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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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이끼 at 2007/06/12 15:51
저런.... ;;; 많이 피곤하셨나봅니다. 릴렉스~
Commented by 아우라 at 2007/06/12 16:14
무섭죠. 그럴때....저는 거의 그런적은 없는데 술마시고 필름 끊긴 분들이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아무것도 생각안나면 굉장히 무서워 하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저는 막 각색해서 그분들 놀려먹는게 취미...^^:;
Commented by 아마란스 at 2007/06/12 16:15
ArborDay님에게는 두개의 인.....[철썩]
나름 호러 소재군요. 자신이 잠들어있는 사이에 유대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또 다른 인격이라...-ㅁ-!
Commented by 돼지콜레라 at 2007/06/12 16:42
전 그런 기억은 없는지라 생각만해도 떨리네요.; 제 친구 중 한명은 술취하면 전화하는 버릇이 있는데, 술깨고나면 전화한것 수습하기 바쁘다더군요.;;
Commented by sesism at 2007/06/12 16:54
어흑어흑 머리만 땅에 대면 쿨쿨 잘 자는 전 피곤하지도 않은 주제에 종종 남자친구와의 통화를 기억 못하곤 한답니다. 그애는 이제 그러려니 해요. 아니, 늦게까지 안자고 깨어있다가 전화를 받는다는걸 더 이상하게 생각하는것 같아요 -ㅁ-
Commented by 비둘기는... at 2007/06/12 18:11
헉... 저는 그런 경험이 없기에... 분명히 전화를 안 받았다고 생각했었겠죠? 그런데 전화는 왔고... 흠냐. 혹시 형네 집에 누군가가 (그건 귀신일 수도 혹은 다른 차원의 생명일 수도 있겠죠?^^) 있는 거 아닐까요? 암튼, 기억 나지 않는 것 만큼 무서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푹 쉬세요^^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6/12 18:13
이끼님/ 요즘은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단기간 집중공부는 이제 체력에 부친다는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더니.

아우라님/ 허헛. 그거 좋지 않아요. ㅠㅠ

아마란스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내가 자는 동안 움직이는 또 하나의 나라니!!

돼지콜레라님/ 잠깨고나서 수습하는게 좀 더 어려울 듯 싶습니다. ㅠㅠ

sesism님/ 햐, 타고난 재능이시네요. 전 불면의 밤이 꽤 오래 계속되어서.
전 보통 전화 마치고 자는 편인데, 남자친구분은 저와는 조금 패턴이 다른가 봐요. (웃음)

비둘기/ 20일까지는 못 쉴 것 같아. 하지만 이 달 말에는 쉴 일이 좀 있을 것 같네. 꾹 참고 버텨야지!!
Commented by 천용희 at 2007/06/12 22:20
수습에 많은 에로 사항이 있으시겠군요.

저도 자다보면 저런 일이 있는데 다행히도 몇번을 제외하고는 전화가 간 시간이 1분 내외더군요. 신호 가다 끝났다는 예기라서 다행으로 여깁니다.
Commented by yosuda at 2007/06/13 00:51
술을 안마시고 단지 피곤한 것만으로도 그게 가능하군요. ^^;;
정말 많이 수고하셨어요. ^^
Commented by 사랑이아빠 at 2007/06/13 08:50
정말 오싹하군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말이나 행동을 했다는것.. 절대공감합니다.

중학교때 학교에 갔더니 애들이 괜찮냐고 물어보더군요. 왜그러냐고 했더니, 어제 체육시간에 '씨름'수업을 하다가 아스팔트바닥에 자빠졌다고 하더군요.
그날의 기억이 없습니다. -_-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하루의 기억이 없다는것이, 그날 나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는게 참.. 기분이 어정쩡합니다. 찝찝하기도 하고.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6/13 10:21
천용희님/ 구태여 수습 안하려구요. 내가 전화해서 무슨 소리 했었지?라고 묻는 것도 웃기고.
저도 보니까 거의 통화가 2분 안쪽이더라구요. 별 얘기 했겠어요? (웃음)

yosuda님/ 전 술 먹고 그래본 적이 없어서, 상당히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몇 번 쯤 전력이 있을 것 같기도 해요. ㅠㅠ

사랑이아빠님/ 허허, 그 날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다니. 그렇게 다치고도 별 탈이 없어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사랑이아빠의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서] 등의 작품을 내어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퍽.)
Commented by 석원군 at 2007/06/13 16:32
모르는 전화번호면 대출 아니면 번호이동 상담 전화가 대부분이 신경 안쓰셔도 됩니다. 요즘 왜이리 대출타령들인지 ^^;;;
Commented by 사랑이아빠 at 2007/06/13 16:52
아하하..;; 사실 그 사건 후부터 머리쓰는일은 영 못한다는..(다치기전에도 원래 그랬지만요..;;)

흠. 공포영화 삘로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서]를 만들면 좋겠군요.. 호러블하게.. 하하..;; 무립니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6/13 16:55
석원군/ 하긴 요즘 살기가 워낙 안 좋다보니, 주위에서도 대출 얘기 많이 하더라. 들을 때마다 맘이 아파.

사랑이아빠님/ 앗, 안타깝네요. 한 번 기대해볼까 했었는데. (웃음)
Commented by Ruii at 2007/06/14 10:46
앗... 저도 그런적이 있는데, 정말 엉뚱한 말만 해서 친구가 끊으려다 웃겨서 계속 듣고 있었다네요;;; 통화내용 듣고 막 웃었어요 =_+;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6/14 14:22
Ruii님/ 제가 듣는다고 상상해보면, 저도 못 끊을 것 같아요. 평소에는 나름 체통 지킨다고 부실한 모습 덜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엉뚱한 소리만 줄창 늘어놓는다고 해봐요.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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