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꿈을 꾸세요 - 귀여운 여인

에드워드는 고소공포증 환자이다. 당연할테지. 그저 올라가는 것(겉보기에는 성공으로 보이는)에만 신경을 썼는걸. 올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 사람에게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마나 두렵겠는가. 웃기는건 고소공포증이 있음에도 그는 단지 특실이라는 이유로 호텔의 꼭대기층에 거주한다는 점. 이 부조리한 상황의 묘사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사실은 변질된 꿈(아메리칸 드림)에 대해 말하기를 원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척 봐도 잘 나가는 것이 분명한 에드워드가 하는 일이 적대적 인수 - 약탈적 자본주의의 꽃인 - 라는 사실과 스크린을 쳐바른 돈다발의 흔적은 미국인의 꿈이 물질주의에 의해서 변질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비비안은 꿈을 쫓아 헐리웃으로 왔다가 현실의 냉혹함에 무너져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인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꿈을 꾸기를 자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중단한 것이다. 정말 할 것이 그것밖에 없었냐는 에드워드의 말에 대답하는 비비안.
"그것밖에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면, 정말 그렇게 믿게 되요."
당연하겠지만 정말로 비참한 것은 몸을 파는 사실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의 파괴이다.

에드워드가 만난 '귀여운 여인'은 물질적 가치에 의해 상품화된 비비안의 쭉쭉빵빵한 외모가 아니었다. (예쁘지 않았으면 기회라도 있었을까보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만났던 '귀여운 여인'은 그녀의 안에 숨어 있는 순수함, 즉 에드워드에게 결여된 속성이었던 것이다. (스스로가 생각했던) 성공가도에서 그는 자신이 놓쳐온 것들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감정의 회복, 인간성의 회복. 그리고 비비안은 자신을 좌절하게 했던 얼마간의 물질을 획득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두 캐릭터의 사랑 - 현실에서는 있기 어려운 신데렐라 이야기 - 은 결국 변질되거나, 무너져버렸던 꿈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영화의 마지막 흘러나오는 보이스. 노골적으로 영화는 자신의 목적을 드러낸다. 그리고 비록 변질된 꿈이나 꿈에 대한 좌절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계속 꿈을 꿀 것을 권한다.
"헐리웃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여기 옵니다. 꿈의 땅 헐리웃. 일부는 이루어지고, 일부는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계속 꿈을 꾸세요. 여기는 헐리웃입니다." 
꿈이라는 것을 꾸기 어렵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것이 노동자를 현혹하기 위한 목적에서 과장될 수 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꿈꾸는게 나쁜가? 나는 신분 변동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사회가,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조금은 나아진 세상이라고 믿는다. (물론 딱 신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실현 및 유지가 가능하다면 신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더 낫겠지.) 게다가 꿈은 꼭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무슨 말이냐면 열심히 살아갈 추동력이 되어주고,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2007. 2. Arborday.




덧 1. 영화는 현명합니다(혹은 약삭빠릅니다). 각각의 캐릭터를 옹호할 수 있는 여지 - 예를 들면 에드워드는 원래 그 일을 하기 싫어했다거나, 비비안은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거나 - 를 만들어놓았거든요. 그들에게 쉽게 감정이입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멋지기 때문만은 아닐겁니다. 어찌 되었거나 [귀여운여인]은 삶의 무게 속에서 자신이 추구해야 할 것을 놓쳐버린 현대인들에게 정말 꿈같은, 동시에 매력적인 이야기일거라 생각합니다.

덧 2. 사실 이런 류의 영화는 여성을 위한 판타지물일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잘 감상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제대로 본 건 이게 처음이로군요. 비록 장면장면은 거의 알았지만. 어쨌거나 그게 전부는 아닌 영화더군요. 게다가 이건 개인적 성향에 가깝겠지만 저를 정말로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사실은, 제게 이 작품은 여성의 판타지라기보다는 남성의 판타지 쪽에 더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풀어말하면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맘만 먹으면 정말 무엇이든 다 해 줄 수 있는 남자. 그것도 멋지지 않나요? 물론 상상 속에서 리처드 기어가 되는 맛도 나쁘지 않지만.

덧 3. 이 작품의 O.S.T는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 중 하나였습니다. 'It must have been love'를 비롯하여 이 O.S.T에는 정말 좋아하는 곡이 많았는데, 영화도 보지 않고 카세트테이프를 샀던 이유는 길을 걷다가 흘러나온 음악 'Fallen'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레코드점에 들어가서 "지금 나오는 이거 주세요."라고 말한 후 들고 나왔었죠.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by ArborDay | 2007/02/08 10:26 | 비호러 | 트랙백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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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kiekie at 2007/02/08 11:25
밸리 링크타고 왔습니다. 글 잘 보고 갑니다.
Commented by sesism at 2007/02/08 11:29
ArborDay님은 언제나 시각이 정답 수준이라 부러워요. 얼마나 많은 영화를 보면 그렇게 되나요.
Commented by dcdc at 2007/02/08 11:59
어렸을 적 멋모르고 보았던 영화였는데...포스팅을 보고나니 다시 한번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2/08 12:56
kiekie님/ 반갑습니다.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sesism님/ 부럽긴요, 정답을 추구하는 사람은 재미없어 보이는걸요(정답 수준의 시각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지만).

dcdc님/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더라구요. 조금만 관대하게 바라보자면, 퀄리티도 꽤 높고 말이죠.
Commented by 겜퍼군 at 2007/02/08 13:09
노래 좋네요. ㅎㅎㅎ 뭐 워낙 영화를 단무지스럽게 봐서요. 음 노래가 너무 좋아요.. ^^;;;
Commented by 돼지콜레라 at 2007/02/08 16:18
영화를 본지 하도 오래되서 가물가물한데, 이 글을 읽으니 왠지 이 기회에 다시 한번 보고 싶네요.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2/08 17:07
겜퍼군님/ 노래 좋지요? 길을 지나가다가 삘이 꽂혀서 바로 구입했던 앨범이에요. 하긴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 샀던 앨범이 많았죠. 테이프나 CD를 사는건 일상적인 행위였으니까,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돼지콜레라님/ 그럼 한 번 감상해보세요. 제가 그 동안 줄리아로버츠를 별로 안 좋아했던 이유가 이 작품을 안 봐서라는 주변의 이야기가 확실히 맞는 것 같네요.
Commented by 비둘기는... at 2007/02/08 17:42
저도 이 영화는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ㅠㅠ 리차드 기어랑 줄리아 로버츠를 별로 안 좋아하다보니 영화도 이상하게 안 보게 되네요... 근데 앞으로도 이 영화는 안 볼 것 같아요...^^:;
Commented by 비둘기는... at 2007/02/08 17:57
이상하게 취향이 아니다 싶은 영화는 도전조차 안 하는 것 같아요. 특정 영화에 대한 매니아 취향을 가진 사람의 고질병같아요...ㅎㅎ 편식은 나쁜데.... 그래도 요즘 멜로영화는 조금씩 보고 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로맨틱 코미디는 힘들더군요...ㅠㅠ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2/08 18:06
비둘기/ 흐흐흐, 보기 힘든 영화를 보는건 고역 그 자체야. 아마 몇 년 전만 같았어도 난 이 영화 못 봤을걸.
사실 이 작품을 보게 된 첫번째 신호탄은 당황스럽게도 휴그랜트를 좋아하게 된 사건이지. [어바웃 어 보이]에서의 그를 보고, 그의 작품을 보다가 [노팅힐]을 보게 된 거고. 그래서 줄리아 로버츠에 대한 비호감이 어느 정도 제거되었지. 그렇게 겸사겸사 거슬러 올라가던 중, 인터넷에서 또다시 'Fallen'을 들었어. 그러자 그걸 영화 속에서 확인하고 싶다는 거스를 수 없는 충동이 생기더라.
물론 영화를 보기 시작하고나서는 영화만 봤지. 재미있더라고.
Commented by 북극찐빵 at 2007/02/08 19:32
저는 꺼리는 류의 영화이긴 한데 여자들의 판타지이며 남자들의 판타지이기도 하다는 말씀에 동감입니다^^;
Commented by 히치하이커 at 2007/02/08 21:33
뭐 영화적인 평가는 제쳐두고 저는 도대체 줄리아 로버츠가 뭐가 예쁜지(혹은 귀욥거나 섹시하거나...) 모르겠습니다. ㅡ ㅡ; 아, 그래도 노팅힐은 재밌더군요 큭
Commented by 미디어몹 at 2007/02/09 09:24
arborday 회원님의 상기 포스트가 미디어몹에 링크가 되었습니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2/09 09:26
북극찐빵님/ 단지 비싸다는 이유만으로 특실을 선택할 수 있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

히치하이커님/ 사실 저도 줄리아 로버츠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도는 매우 낮습니다. ^^

미디어몹님/ 감사드려요. ^^
Commented by 3fisher at 2007/03/30 17:11
이 포스트가 피쉬스토리에 공개되었습니다. 늘감사 ^^.
아. 배너도 있어요.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3/30 18:41
3fisher님/ 오오. 배너가 있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예쁘게 사용해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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