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누나가 흡혈귀건 아니건 상관없어. 누나가 영국에 가건 안 가건 상관없어. 그러나 오늘은 일요일이잖아?"
- 극중 신하균의 대사

'벽장바깥으로 나오다'라는 말에서 유래된 커밍아웃이라는 용어가 원래 성적소수자들의 자기 정체성 고백에 대한 것임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의 흡혈귀는 성적소수자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의심 수준은 아니에요. 누나와 남동생의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확신할 수 있죠.

성적 소수자의 커밍아웃이 뭐가 그리 재미있겠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꽤나 재미있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커밍아웃을 하는 주체가 아닌 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에 포커스를 맞추기 때문일겁니다. 사실 엄청나게 마음의 준비를 한 후 고백을 하고 영국으로 떠나려는 사람보다, 그 고백을 아무런 준비없이 듣고난 사람의 반응이 훨씬 다양하게 나타날테니까요.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덤덤하게 지나가는 누군가도 있을테고, 누군가는 그것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할 것입니다.

소수자이기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경우가 물론 훨씬 많겠습니다만, 때로 관계는 역전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의 여중생의 대사, "저 혼자 빨려본거에요? 궁금하면 직접 겪어보세요."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재미있는 대사가 되고맙니다. 소위 전문가라는 계층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정보를 독점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소수자는 커밍아웃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지만, 그들의 주위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들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조용한 가족]의 모든 사건들이 한 남자의 죽음 - 자살하겠다는 속내를 두어차례 내비친 - 을 막지 못해 일어난 것과 유사하게, [커밍아웃]의 모든 사건들은 한 여자의 고백에 대한 엉뚱한 반응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고백의 의도는 순수하게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겠지만, 그 반응은 그런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구요. 그런 의미에서 김지운의 [커밍아웃]은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관계에 대한 블랙코미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가슴 속에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테고 그것을 고백하면 비슷한 상황이 재현될 것 같으니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아요.
[커밍아웃]의 가장 큰 재미는 소통이 어긋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바라보는 것에 있습니다. 특히 동성애를 묘사한 듯한 마지막 장면은 호기심에 의해 그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요구에 응답함으로써 스스로를 호기심의 대상 - 관객에게는 눈요기대상 - 으로 격하하는 상황이라고 생각되거든요. 물론 흡혈귀임을 증명하기 위해 여중생의 목덜미를 무는 것도 정말 우습지만.

[커밍아웃]의 또다른 재미는 흡혈귀라는 것이 병 - 의학적인 의미에서의, 유전자상의 문제 - 의 일종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은 모두 거짓이라고 부정하는 등 전통적인 공포영화의 코드들을 비틀고 있는데서 나옵니다. 밤에 활동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사람이 적어 피를 빨기 쉽기 때문이고, 목덜미를 무는 이유는 피부조직이 연하기 때문이라네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목덜미를 한 번 만져봤는데, 과연 그럴듯 합니다. 신하균이나 임원희, 그리고 우희진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겠네요.

정리하자면 [커밍아웃]은 매무새가 썩 좋은 영화도 아니고, 그렇게 진지한 영화까지도 아닙니다만, 상당히 재미있는 영화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by ArborDay | 2006/11/08 14:05 | 공포/호러 | 트랙백(1) | 덧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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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BAD TASTE! at 2006/11/08 15:39

제목 : 커밍아웃, 김지운
<커밍아웃>은 40분 짜리 농담입니다. 노골적으로 퀴어영화임을 알리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어떤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아요. 우리는 <커밍아웃>이라는 제목 때문에, 이 황당함 뱀파이어 이야기가 동성애자들에 관한 비틀린 패러디라는 점을 전제하고 감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성적소수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려는 영화는 아니에요. <커밍아웃&......more

Commented by hihi at 2006/11/08 14:20
이 영화에서 신하균, 참 독특했던 것 같아요. 여자 배우들도 그렇고요. 사실 [다찌마와 리]가 많이 입에 올랐지만, 음, 이것두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이었던 거 같습니다. 김지운은 이상하게, 날이 갈수록 장르화돼 가는 듯하네요. 근데 이상하게도, 장르화될수록 저는 더 정이 가네요. 작품성 운운하면서 딴지를 거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지만요. 헤... 그냥 모.
Commented by dcdc at 2006/11/08 15:14
재밌는 아이디어 괜찮은 소재 같습니다...소수자의 커밍아웃과 그 관계라 >_<
Commented by 이녘 at 2006/11/08 15:40
여중생의 대사는 정말 익살맞았어요. 으음. 김지운의 코미디가 보고 싶습니다 ;ㅁ;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1/08 16:39
hihi님/ 저는 [다찌마와 리]보다는 이 작품이 좋았습니다. 개인적 취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구요.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스타일이 부쩍 강조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조용한 가족]에서의 산장의 인테리어조차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었거든요. 물론 김지운 감독 이후 - 구체적으로 [장화,홍련] - 때깔을 중시하는 작품들이 득세하는 것은 반갑지 않지만, 제대로 된 스타일리스트는 사랑할 수 밖에 없지요. 저도 매우 좋아하는 감독이랍니다. 호러장르에서 날려주면 더 고맙겠습니다만, 어떤걸 만들어도 자기 정서를 버리지는 못할테니 항상 기대하는 몇 안되는 분이죠.

dcdc님/ 재미있습니다. 소품이구요. 50분이 조금 못되니 단편영화치고는 꽤 긴 분량이기는 합니다만.

이녘님/ 네, 저는 그 대사에서 자지러질뻔 했습니다. 그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그런 강렬한 대사라니.
Commented by 미디어몹 at 2006/11/08 18:34
arborday 회원님의 상기 포스트가 미디어몹 메인에 링크되어 있습니다
Commented by 너른바람 at 2006/11/08 19:05
흡혈귀에 관한 설정이 만화 '총몽 라스트오더' 에 나온 것과 비슷하네요. :) 어떤 전형적인 이론이나 시각으로 빚어지는 편견이란 것에 대한 역발상은 대개 비슷해지는 듯 합니다. 이적씨의 '지문사냥꾼' 에 나오는 '음혈인간(飮血人間)으로부터의 이메일' 편의 설정도 생각나네요 :) 캐스팅도 마음에 들고 정말 영화 자체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레드몽키 at 2006/11/08 19:52
윽..갑자기 이 단편을 어디서 봤었는지 기억이 안나네요..다찌마와 리와 함께 있었던 것..맞나요..암튼 꽤 즐겁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1/08 21:31
미디어몹님/ 감사드립니다. ^^

너른바람님/ 예, 아무래도 그런 감이 있나봐요.
저는 만화 '피안도'를 요즘에야 접하게 되었는데, 이것 참 독특한 설정이더라구요.
혹 안 보셨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전 총몽을 못 봤으니, 한 번 감상해봐야겠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습니다. 가끔씩 단편을 봐줘야 머리가 개운해진다는. 흠흠.

레드몽키님/ 네, 맞습니다. [조용한가족] dvd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그 방법으로 감상했지요. ^^
Commented by 91 at 2006/11/08 23:50
저도 이영화 참 인상깊게 본 기억이 납니다.
성적소수자를 흡혈귀에 빗댄 은유도 참 인상적이었구요. 담담한 시선으로 동생(신하균)이 누나(흡혈귀)의 고백을 촬영한 장면은 우리가 자신의 진실을 폭로하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는가 하는것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했습니다.
성적 소수자들의 성적 정체성이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한사람의 사람이 아닌 어떤 생소하고 불결한 존재로 인식하진 않는지 질문하게 했습니다.
이 영화와 비슷한 시점에 함께 공개된 [다찌마와 리]나 [극단적 하루]와 비교했을때 단연 문제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Commented by 구라왕국 at 2006/11/09 01:42
전 김지운 감독님 팬이지만 -_-
이영화 보면서 졸앗다는 ㅠ
피곤할때 봐서 그런가?
나중에 다시한번 봐야겟군요! ㅋ
Commented by 솔리드 at 2006/11/09 11:26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장화,홍련은 수작이라고 생각듭니다..
꼭 보고 싶네요..어찌 이런 영화가 만들어 졌는줄도 모르죠..저는..^^;
Commented by shuai at 2006/11/09 13:23
세 개의 단편 중에서 가장 웃으면서 본 영화가 이 영화였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 글 참 좋습니다. 저는 그냥 생각없이 봤는데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잘 정리해주셨네요.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에 포커스를 맞추기 때문'에 재미있다는 ArborDay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1/09 14:30
91님/ 누나의 고백을 촬영하는 동생의 모습에서, 브라운관을 통해 걸러진 진실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보였답니다. 뭔가 한 발짝 떨어진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구라왕국님/ 피곤할 때 보면 어지간해서는. ^^;;

솔리드님/ 저도 [장화,홍련]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 작품의 경우는 단편이기도 했고,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접하기가 어려웠을겁니다. 모를 수도 있지요, 뭐. ^^

shuai님/ 감사드립니다. 사실 연예인들의 커밍아웃 같은거 아무런 감흥이 없는 편인데, 그걸 듣고 광분하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재미있거든요. 개인경험에서 나온 생각이에요. ^^
Commented by 풍류도인 at 2007/10/26 21:35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작품을 보지 못 해서 무척 안타까워요. 거기다 감독이 무려 ‘김지훈’이라서 더욱 더 안타까워요. 흑흑 ㅠㅠ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10/28 13:44
풍류도인/ 내가 오타를 낸 줄 알았네. ^^;;
꼭 보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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