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스러운 자기 유희 - Slither
올해 만들어진 공포영화 중에서 제가 본 것 중 가장 즐거웠던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주저없이 <슬리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일부는 이러한 대답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슬리더>는 작품성과는 거리가 먼 - 진지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기존 영화들의 짜집기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80년대 호러영화들의 매력을 그리워하시는 분들이라면, <슬리더>는 그 상영시간 내내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내용 공개 일부 있습니다>

감독 제임스 건은 <새벽의 저주>의 각본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트로마사가 만든 영화 <트로미오와 줄리엣>의 공동제작자로 영화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트로마사와 관계된 인간 중 공포영화 매니아가 아닌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결과물도 어마어마한 잡탕이 나와버렸습니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역시 공포영화 매니아로 소문난 프레드 데커의 <나이트크리프스>를 모태로 하고 있습니다. 외계에서 날아온 물체가 비극의 씨앗이 되거나, 인간의 몸(혹은 뇌)을 숙주로 하는 거머리들이나, 불에 약한 속성이나, 영화의 엔딩까지도 <나이트크리프스>와 유사합니다. 여기에 숙주로 삼은 최초의 인간과 정신을 교감한다는 설정을 추가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도 한다는 점에서 노골적으로 <신체강탈자의 침입>류의 성격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나이트크리프스>와 마찬가지로 거머리에게 점령당한 대상들은 좀비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에, 전형적인 좀비물을 답습하고 있기도 하지요. 게다가 마이클 루커의 신체변형(소위 '그랜트 괴물')은 <지옥인간>을 넘어, <소사이어티>의 모습까지도 보이고 있습니다. 브라이언 유즈나 이후 이 정도의 끈적끈적한 신체변형을 다른 영화에서 구경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다른 영화들을 더 언급하려면,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슬리더>는 <패컬티>를 닮아 있기도 합니다. 딱 하나의 작품만 더 언급하자면, 극 중 블렌다가 보고 있는 영화(깝죽거리는 시장에게서도 연상할 수 있겠지만) <톡식어벤저>.

<슬리더>는 선배 영화들을 차용해서 좀 더 세련되고 깔끔한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저 다 가져다 쓴다고 해서 즐거운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이러한 작업에는 장르적 자기 유희 외의 어떤 진중한 메시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문제해결에 다가가는 방법에 대한 설명은 터무니 없이 부족합니다. 어째서 본체만 공격하면 되는건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설명조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슬리더>는 분명 단점을 갖춘 영화입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슬리더>는 그와 같은 단점을 단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즐거우면 될 뿐인 영화일 뿐이라고 자신의 목표를 확실히 설정해 놓고 있기도 하고, 혹은 단점들까지도 실상 다른 영화를 통해 제시된 바 있는 장르의 전통으로 이해해줄 것이라 믿고 있는거죠. 그같은 시도는 매니아들이나 심지어 평론가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아낸 것(사실 조금 의아했습니다)처럼 보이지만, 아쉽게도 흥행실패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애당초 천이백만달러의 수익을 올려도 손익분기 근처에조차 다다르지 못할 영화의 관객을 매니아로 한정(결과적으로는)한 탓이지, 영화가 재미없는 탓이 아닙니다. <슬리더>는 클래식의 지위 - <나이트크리프스>가 없었다면 가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 까지는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해도, 공포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필견목록에 오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제가 그랜트 괴물에게 반한 것과는 별개로, 감독 제임스 건은 그랜트 괴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촉수가 더 실제적으로 느껴지기를 바랬기 때문이랍니다. 그나저나 마이클 루커씨 너무 반갑네요. 내친 김에 <헨리2>를 찍으면 어떠할지.

by ArborDay | 2006/10/08 18:30 | 공포/호러 | 트랙백(6) | 핑백(2) | 덧글(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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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boogie world at 2006/10/19 11:53

제목 : 슬리더.2006
만족스러운 자기 유희 - Slither 보면서 그렘림과 에얼리언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다..특히나 조잡 스럽게 만들어진 괴물이 사람을 도륙하는 장면은 신선했다.뭔가 이상한 느낌을 주는 호러 영화다,,무섭지 않으면서 공포스럽고 역겹고 찝찝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기존의 영화 공식을 따라가는 새로울건 없지만.. 하여튼 끝나면서 찝찝한 느낌을 지울수 없는 영화였다..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어설프고 공포영화에 맞지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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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 하로기~네 무비툰 ▣ at 2007/02/27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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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마이해피엔딩 at 2006/10/08 19:15
저도 재밌게 봤어요. 아내 사랑이 특별한 남편의 순정이랄까...
Commented by boogie at 2006/10/08 19:49
봐야겠군요..
Commented by 미디어몹 at 2006/10/09 08:44
arborday 회원님의 상기 포스트가 미디어몹에 링크가 되었습니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0/09 13:03
마이해피엔딩님/ 아내사랑은 끔찍했죠? ^^

boogie님/ boogie님이라면 반드시 보셔야 합니다.

미디어몹님/ 감사드립니다.
Commented by WindFish at 2006/10/09 16:22
음 보고 싶어지는데요.
공포영화에 도가튼 식목일님께서 무려 "가장 즐거운"이란 단서를 붙이셨으니 이건 꼭 봐야겠군요.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0/09 19:17
WindFish님/ 높은 기대가 부실한 느낌으로 이어질까 걱정스럽네요.
사실 헐리웃이 소재고갈로 인해 리메이크에 주력하거나, 이벤트영화(프레디vs제이슨 등)에 주력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선배영화들을 이토록 모방하고 장난스럽게 만든 작품을 만나는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우 즐거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설정(나이트크리프스, 블롭 등)을 좋아하기도 하구요. 부디 재미있게 감상하실 수 있기를.
Commented by 제목없음 at 2006/10/09 21:02
욕조 아래에 들러붙어있는 거머리와 포스터의 거머리 욕조 상륙작전 때문에 볼만하게 보였는데 어떨지 모르겠군요;


p.s 언급하신 헨리2가 [헨리:연쇄살인범의 초상2]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벌써 소리소문없이 나온듯합니다. Msh(맞나)님의 이글루에 소개가 되었는데 정식 후속작이 맞나 의문이네요...수출제인지는 제가 몰라서;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0/09 21:20
제목없음님/ <슬리더>는 괜찮습니다. 재미있구요.

<헨리 : 연쇄살인마의 초상, 파트2>라는 비디오 작품이 다른 감독에 의해 이미 나왔었군요. 정식 후속작으로 보는게 옳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제 언급은 존맥노튼이 감독하고 마이클루커가 출연하는 후속작 루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거 포스팅의 끝 언저리에 너무 성의없게 한마디 붙여버렸네요. ^^;;
Commented by Ruii at 2006/10/10 13:27
이 영화도 개봉하기는 어렵겠군요..;; 공포영화는 DVD로 기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디; ㅜㅡ
Commented by 차원이동자 at 2006/10/10 20:08
...저거 배꼽인줄 알았는데...대단합니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0/11 00:46
Ruii님/ 어떤 의미에서는 그나마 dvd라도 기대할 수 있는 세상이 반가울 따름입니다. ㅠㅠ

차원이동자님/ 아마 모르고 본다면 충분히 배꼽으로 보실 가능성이!!
Commented by fantastic9 at 2006/10/12 22:15
아 ..저번에 제가 blob포스팅 했을때 말씀해주셔서 재밌게 봤습니다 :]
영화속에서 옛 영화들의 설정과 장면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어요 ~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0/13 00:46
fantastic9님/ 트랙백 감사드립니다. 재미있게 보셨다니 정말 다행이로군요. ^^
Commented by 디오티마 at 2006/10/14 12:23
헨리 연쇄살인자 2는 1990년에 나온 걸로 압니다...마이클 루커가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0/14 15:12
디오티마님/ 마이클 루커도 안 나오고, 존 맥노튼의 영화도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전 속편이 아니라고 생각해버렸어요. 그 때문에 <헨리2>에 대한 덧글이 달렸을 때, 헉 소리가 났죠. 사소한걸 확인 한 번 안 해보고 대충 올린 것에 대한 반성이랄까요.
아차, 제가 알고 있는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 2>는 98년에 나온 작품입니다.
Commented by jjay at 2006/10/16 15:16
어제 봤습니다
재밌었어요, 후훗-
요즘 공포영화관람편수를 조금씩 늘려가고 있습니다.
Arborday님 + 공포영화좋아하는 애인 덕분에요.
Commented by seimei at 2006/10/18 11:00
재미있는 영화겠는데요! 어제 slither라는 단어를 영화가 아닌 다른 데서 보긴 봤는데 대체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민중;;;

저도 저 나이트 메어 씬은 무지하게 섹시한 장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0/18 17:29
jjay님/ 오호, 'Arborday'보다는 '공포영화좋아하는 애인'에 무게감이 훨씬 많이 놓일 것 같은걸요.
재미있게 보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

seimei님/ 재미있습니다. 꼭 보세요.
[나이트메어]의 저 장면은 보고 또 봐도 섹시합니다. 어찌 저런 생각을. 그런데 [나이트메어]는 정말 명장면 덩어리인 작품인 것 같아요. 생각나는 장면들이 꽤나 많거든요.
Commented by boogie at 2006/10/19 11:54
트랙했습니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0/19 12:54
boogie님/ 방금 확인하고 왔어요. 헤헤.
Commented by toluidine at 2006/10/20 16:07
이건 뭐,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더군요. 전체적인 구성 뿐 아니라 소소한 대사 한마디에까지 패러디가 가득하더라구요. 올해 베스트를 꼽으라면 슬리더는 반드시 순위권입니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0/22 23:56
toluidine/ 덧글이 달린 줄 몰랐구만. 자네라면 분명히 이 영화를 사랑할거라 생각했지. ^^
Commented by 몽중인 at 2006/10/27 21:00
먼저 본 친구의 저주에 가까운 악평이 있었으나, ArborDay님의 추천 한방이 훨씬 강하네요. 당장 보러 달려갑니다. ^^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0/27 23:13
몽중인님/ 제 말을 믿으세요. 머리를 비우시고 즐기면 됩니다.
Commented by unique at 2006/12/15 01:45
기생수에 모티브를 둔 영화가 확실할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기생수가 떠올랐음..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2/15 08:37
unique님/ 아무래도 기생수보다는 좀 더 오래된 전통에 근거하고 있을거에요. 물론 비슷한 모티브를 가지고 있죠. 기생수의 가장 큰 매력은 기생체와 공생, 협조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건데, 이 영화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네요. 아쉽게도.
다만 일본 애니들에 종종 등장하는 촉수의 느낌을 살리려고 했던 것 같기는 해요. 스스로 그 장면이 마음에 안들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면.
Commented by 수운 최제우 at 2006/12/30 03:05
저 풍선은 뭡니까?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12/30 15:02
신체가 변형된 것이라고 말해두지.
Commented by Terry at 2007/01/30 00:59
처음에 숲속을 달려가는 장면은 딱 이블데드를 생각나게 하더군요!

좋은 리뷰 감사함다. 이 blog는 공포영화의 성지가 되어가는 듯!
저두 공포영화보면 여기부터 오니까요! 멋지심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1/30 20:31
Terry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이거 즐겁네요.
오토바이에 카메라를 달고 달렸다던 그 기법, 정말 멋졌죠.
그 카메라는 이제 공포영화의 교과서에 오를만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
Commented by 히치하이커 at 2007/05/15 22:24
엄청난 뒷북이지만, 며칠전에야 봤습니다. ArborDay님 말대로 뻔한 짜집기지만...정말 유쾌하더군요. 공포영화 보면서 이렇게 즐거운 기분을 느낀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네요. 하하하. 암튼 진짜 재밌게 봤습니다. : )
Commented by 천용희 at 2007/05/16 13:45
정말 죽여주는 영화죠. 제임스 건의 진정한 능력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나머지는 제가 썼던 글의 링크로 대신 합니다.
http://horrorexpress.co.kr/bbs/zboard.php?id=hreview&page=1&sn1=on&divpage=1&sn=on&ss=off&sc=off&keyword=천용희&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637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5/16 16:26
히치하이커님/ 작년 최고의 호러물이었습니다. 정말 물건이죠.

천용희님/ 그 글은 저도 읽었을걸요. (웃음)
Commented by 연우야 at 2007/07/02 19:45
오오..저도 이 영화 무척 재미있게 봤습니다. 호러장르의 전통이 잘 살아있어서 무척 느낌이 좋았지요.^^ 저도 여기에 대서 리뷰 쓴게 있는데 트랙백으로 올려놓고 갈께요.
Commented by ArborDay at 2007/07/06 12:34
연우야님/ 정말 즐거웠습니다. 무턱대고 가져다 쓴다고 해도, 그만큼 재미있게 만들기가 쉽지 않거늘. 아, 또 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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