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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괴물'에서 괴물은 단지 조연에 그치고 있습니다. 괴물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진짜 괴물 - 부조리한 사회, 연구자, 경찰, 386세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실 - 에게 관객을 끌고가는 역할 이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장르영화, 특히 괴수물에서 괴수의 탄생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괴수를 만들어낸 이유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자 비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괴수는 미군이 버린(한국인의 손을 빌어) 독극물로부터 탄생하였고, 한강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한' - 끝까지 둔한 자식들이라며 그런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조소를 내뱉고 뛰어내리죠 - 을 먹고 몸집을 키워갔습니다. 결국 둘 모두 부조리한 현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사람이 죽어 있는 곳에서 높은 분이 떴다고 유가족들에게 "차를 빼라."라고 고함을 지르고, 공공연하게 뇌물을 요구하는 공무원과,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들어주지 않는 경찰과 의사, 없는 것을 만들기에 급급한 미국(이라크 사태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무리일 듯 싶더군요), 후배를 팔아먹는 386세대를 대변하는 선배(데모만 하다가 월급쟁이로 주류사회에 편입된). 언급한 것 외에도 영화 내내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집니다. 장르가 장르이다보니 유머로 그런 현실들을 담아내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되지만, 확실히 너무 노골적인 시선은 조금 부담스럽더군요. '반미'는 그저 병풍일 뿐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의 가족은 모범적인 가족이 아닙니다. 3형제들은 모두가 한 가지 이상을 결여하고 있을 뿐더러(예를 들자면 송강호는 모자란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니고, 경제력이 없고 궁시렁대기만 하는 둘째, 중요한 순간에 자신감을 결여한 셋째), 서로 간의 유대관계도 그리 끈끈하지 못합니다.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들은 '현서'라는 아이를 목적으로 뭉친,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네 덕분에 우리가 모두 모였구나."라는 대사가 그리 웃기기만한 대사는 아닌거죠. 그래서 '현서'가 사라지고 난 후, 형제들이 나오지 않는건지도 모릅니다. 형을 무시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모두 자느라 듣고 있지 않는 장면을 통해 공동의 목적을 가진다고 해도 얼마나 연대가 어려운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더불어 세대간 단절의 뉘앙스 역시). 아버지가 죽은 순간 뿔뿔히 흩어져버리는 형제들(너무나 무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의 모습 역시 그런 연장선상에 있죠. 어쨌거나 감독이 말하는 진짜 괴물에 맞서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풀뿌리 민초들의 연대인 것 같습니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라고 말하는 노숙자까지 그 연대에 가담하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괴물은 가족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이 영화가 사회부조리에 대항하는 집회에 참여할 것을 선동하는 영화라도 되는 것처럼 설명했습니다만, 그렇다고해서 감독은 시위대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던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멍청하게 한강까지 밀고 갔다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시위대는 자처하더라도, 반칙왕의 엔딩을 떠올릴만한 최후의 화염병 뻘짓은 결국 시위대의 무력함을 연상시킵니다. 물론 괴물을 향하고 있는 그 화염병의 방향성이 올바르고 괴물퇴치에 일부 공헌한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주적이 앞서말했듯 한강에 살고 있는 '괴물'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낸 자들이기에 저는 화염병이 결국 본질을 겉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건 그런 이유에서 부조리에 의해 만들어진 - 본질적으로는 희생자와 같은 부분(진짜 괴물에게 좌지우지됨)을 공유하는 - '개구리 괴물'과 첫째 아들이 마주 대면하고 생사를 다투는 그 순간, 너무나 처절하다는 생각과 모종의 연민이 지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강에 살고 있는 '개구리'를 죽이고, 송강호는 다시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갑니다. 딸 대신 그와 유사한 존재를 거둬들이는 그 인간성, 그리고 딸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이어가는 실천이야말로 이 모든 모순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여기에서 송강호의 머리 색이 검정색으로 변했다는겁니다. 사건을 통해 그는 올바른 모습의 아버지로 변한거죠. 딸의 죽음이 아버지의 뻘짓 - 다른 아이의 손을 잡은 - 때문에 생겼기에, 이제는 모범적인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렇다면 결국 영화가 제시한 그 무수히 많은 현실비판들은 단지 아버지 개인의 실수 탓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일텐데요. 그보다는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르겠군요. 왜 하필 그런 표현이 남들과 같아지는 것으로 귀결되는지에 대해서는 불만이지만.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통해 현실의 많은 부분을 비판했지만, 민초만이 희망이다라는 정말 꿀꿀한 원론에 그치는(사실 다른 대안도 없을테구요)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극중 박해일과 봉준호 감독이 겹쳐보이는 이유입니다. 개구리는 죽었지만, 괴물은 죽지 않았습니다. 주류사회에 편입된 채 그냥 그러려니 살아가기에는 아직 무찔러야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확실히. 덧 1. CG나 장르영화로서의 괴물은 확실히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진짜 괴물과 그냥 괴물을 구분하기 위해 '개구리'라는 표현을 썼지만, 조악한 CG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앞으로 이쪽 장르의 영화들이 많아질 것이란 생각도 들고, 관객이 기대하는 기대치를 채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나저나 봉준호가 만들면 괴수물도 이런 영화가 되는군요. 덧 2. 그렇게 웃어야 할 장면이 아님에도, 극장에서는 자지러지는 웃음 소리가 들리더군요. 감상에 조금 방해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뭐, 극장이란 원래 그런 곳이라 생각하고, 그리 까탈스럽게 굴 생각은 없지만요. DVD출시를 몹시 기다립니다. 느긋하게 곱씹으며 감상하고 싶네요. 그나저나 왜 갑자기 '플란더스의 개'가 보고 싶어질까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