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1월 25일
공포영화의 역사 - 두번째, 선구자들의 출현
3. 위인들의 도래와 고어의 약진 - 50~60년대
2차대전 종전 후 국제정세의 개편으로 등장한 매커시즘과, TV의 보급으로 인해 영화산업은 다소 도전을 받게 된다. 호러영화 역시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는데, 50년대 중반 이후 위대한 감독들이 도래할 때까지는 약간의 침체기를 겪게 된다.
물론 이 시기에도 잘 만들어진 호러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매커시즘의 불안한 심리를 스크린에 나타낸 돈 시겔의 '신체강탈자의 침입'이 있었고, SF호러물이라 할 수 있는 'Them!'과 'Creature from the black lagoon'과 같은 작품들이 나타났다. 50년대 주목할만한 사실 중 하나는 SF호러물들이 약진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The Blob'이나 'The Fly' 등도 이 시기(50년대말)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SF 호러물들의 약진은 순수 호러팬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부터 언급할 사건들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고 봐도 좋을만큼, 50년대 중반으로부터 60년대초에는 각지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나타났다.
2차 대전 당시 인기를 끌던 스릴러영화를 찍던 히치콕은 60년 '싸이코'를 찍으면서 공포영화사에 한 방점을 찍었고, 그보다 이른 50년대 중반에는 그 유명한 해머사의 간판 '테렌스 피셔'와 지알로의 아버지 '마리오 바바'가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비슷한 시기인 50년대 중반 '로저코먼'이 등장했으며, 58년 'macabre'를 기점으로, '헌티드 힐', '13고스트' 등을 만든 '윌리엄 캐슬'도 등장했다.(개인적으로는 '스트레이트 자켓'을 윌리엄 캐슬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합니다.) 그 뿐이랴? '고어영화'의 선구자 '허셀 루이스 고든'도 1962년 '피의 향연'이라는 작품으로 대중에게 악명을 날리기 시작한다. 이런 60년대의 끝자락에 시체3부작의 '조지 로메로'까지 등장한다.(제스프랑코와 장롤랭, 로만 폴란스키 등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60년대는 이들 위인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내며 활약하고 후대의 감독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던 시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들 감독들은 '고어'에 있어 이전 감독들보다 나아간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검열의 완화나 상업적 측면 등 다양한 원인이 있었겠지만, 만드는 자와 마찬가지로 관객 역시 더 보고 싶어했던 것이 분명했다.
1) 50년대 중반 ~ 60년대 - 해머영화사의 전성기
50년대 중반 이후 영국은 호러영화에 있어 자신의 저력을 온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해머영화사는 검열이 완화되기 시작했던 51년부터 섹슈얼리티가 강조된 저예산 공포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테렌스 피셔는 52년 해머영화사에 합류하면서 인생의 절정기를 맞게 되어, '드라큐라', '프랑켄슈타인의 저주' 등 연이은 히트작들을 생산해낸다. 해머사의 영화는 '고딕호러'라는 이름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고딕호러란 고딕소설을 근간으로 하는 영화로서, 시대극과 같은 특징을 보이며(과거 소설을 근간으로 했기 때문에 당연하겠죠) 주로 악의 근원이 귀족층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딕소설로 유명한 것은 '프랑켄슈타인',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드라큐라'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 고딕소설의 많은 작품들이 이미 유니버설에 의해 영화화되었으므로, 해머사의 영화는 유니버설 호러영화들의 컬러 리메이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니버설의 몬스터들과 달리 테렌스 피셔는 '선악의 대립', '영혼과 육체의 대립', '계층의 대립' 등을 강조함으로써, 일말의 동정심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기존의 고딕소설은 새로운 각본들로 대체된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이야기들의 토대는 바뀌어 버리게 된다. 새로운 구미에 맞는 캐릭터들의 재설정이 이루어지고, 현대적 의미의 몬스터물의 정형화가 완성된다.
'호러 오브 드라큐라'가 인상만 잔뜩 쓰고 있는 벨라루고시를 귀족 신사의 모습인 크리스토퍼 리로 대체해버리는 것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호러영화가 다시 돈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 장르는 크리스토퍼 리나 피터 커싱과 같은 스타 배우들을 만들어낸다.
2) 지알로 무비의 완성 - 마리오 바바
1956년 리카르도 프레다는 바토리 백작부인의 범죄를 현대화시킨 '뱀파이어들(I vampiri)'의 작업을 맡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이태리 환타스틱 영화의 황금기를 촉진시켰다는 영화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호러팬들에게는 마리오 바바의 등장을 부추킨 영화로 더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제작진들과의 불화로 프레다가 촬영을 포기하자, 원래 사진 감독으로 고용되었던 마리오 바바는 영화를 완성했다. 특히 그는 이 작품에서 공작부인의 노화장면을 찍음으로서, 공포영화감독으로서의 싹을 보이게 된다. 4년 뒤 바바는 '악마의 가면(The mask of satan)'으로 첫 장편영화를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이 작품에 등장했던 바바라 스틸은 향후 '호러퀸'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피셔가 '선과 악'을 대립시켰다면, 이태리의 바바는 '진실과 거짓'을 대립시켰다. 이는 지알로가 일종의 잔혹추리물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선악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바가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인간의 두려움이나 광기로 인한 파멸이었다. 바바의 영화들은 관례적인 신화나 소설 등에서 벗어나 인물들의 두려움이나 광기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이끄는, 일종의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인간 행동의 결과로 가장 비극적 결말인 죽음과 살해에 집착하고, 이는 당연하게 잔혹함으로 나타난다.(사진은 절판된 바바 박스셋, 'The whip and the body'를 포함한 3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3) 고어영화의 등장 - 허셀 고든 루이스
미국에는 1951년 이후 드라이브인 극장이 상당히 많이 생겨났다. 1963년에는 미국에 대략 4천개 가량의 드라이브인이 있었고 이들 극장은 전체 극장 수입의 33%에 달하는 수준까지 성황했다. 메이저 영화사들은 이러한 형편없는 극장에 자신의 영화 상영권을 주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고, 따라서 처음의 드라이브인의 상영작들은 대체로 옛 영화의 재상영이었다. 영화 자체보다는 외출의 마지막 코스로 이 곳을 택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영화의 질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저렴한 가격과 화목한 분위기로 인해 가족 관객들이 이 곳을 많이 찾았다. 그러나, 50년대말 이후 TV의 보급으로 인해 고객층은 자유의 공간에 매료돵한 학생들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드라이브인은 '개척 영화'들의 도약을 가능하게 했고, 첫 고어작품인 '피의 향연' 역시 이 곳에서 개봉하게 된다.
감독 허셀 고든 루이스와 제작자 다비드 프리드먼은 원래 싸구려 누드 영화의 전문가였다. 그들이 드라이브인에서 보잉이라는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무렵, 메이저 제작사들이 대담한 영상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변화가 필요했고 이런 변화의 아이디어를 19세기말부터 파리 등지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잔혹 연극 '그랑기뇰'에서 얻었다. 그들은 배급적인 한계로 인해 큰 영화사들이 찍을 수 없을만큼 지나친 고어를 선택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살 길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H.G.루이스는 'Gruesome Twosome', 'Wizard of gore', '2000 maniacs' 등 대략 10년여동안 여러 작품을 만들었지만, 자신의 돈을 투자한 후 그 돈을 되돌려 받기 위해 배급사를 찾아 뛰어다니는 것이 지쳐 영화산업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최근(2002년) 타인의 돈으로 찍는다는 조건하에, 41년만의 속편 'Blood feast 2 : All U can eat'로 잠시 돌아온바 있다.
당시 H.G.루이스와 필적할만한 활동을 보인 감독으로는 앤디밀리건('The Naked Witch', 'Bloodthirsty Butchers' 등) 정도만을 손꼽을 수 있다. 앤디 밀리건은 자신이 사망하기 1년 전인 90년까지 대략 20편 이상의 공포영화를 더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도 역시 H.G.루이스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선구자였을 뿐 거장이라는 칭호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냉정히 말하자면 에드우드의 영화보다도 훨씬 허접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이들이 이후 공포영화의 잔혹성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공포영화의 고급화 - 살아난 시체들의 밤
67년 봄부터 9개월간 촬영된 'Night of the living dead'는 공포영화사에서 한 획을 그은 소위 위대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드라이브인에서 개봉한 후 70년에는 현대 미술관에서 소개되는 등 기존 공포영화가 누릴 수 없는 영화를 누렸다. 이후의 많은 공포영화에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70년대에는 한 학파를 만들어버릴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영화였다. 제작자조차 구하지 못해 자신들의 돈으로 설립한 제작사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에 대해 고급화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이 작품은 '겉'이 아니라 '속'에 있어서 정말 고급이었다.
이 작품은 제작비 때문에 공포영화로 장르가 선택되었고. 기록영화 스타일로 촬영되었고, 컬러보다 싼 흑백필름이 사용되었으며, 삼각대조차도 필요없는 핸드헬드로 촬영되는 등 처음부터 상업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그들의 제작사 '이미지 텐'에게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안겨주었는데, 배역들의 심리적 측면과 제한된 공간에서의 긴장감이 돋보인 것이 주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미지텐은 조지 A. 로메로를 포함한 10명의 친구들이 각각 6백달러를 출자해 만든 제작사로, 제작자를 찾지 못해 자신들이 직접 만든 회사입니다. 의외로 당시 10인 중 한 명도 호러 장르를 좋아한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제작비가 충분했다면, 이런 걸작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공포영화산업이 겪고 있던 그런 어려움을 감사해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H.G.루이스와 비슷한 엉성한 트릭으로 고어를 표현했지만, 이 작품은 루이스의 것과는 달리 완성도 있는 비판 덩어리였다. 로맨스에 빠지기엔 너무 넋이 나가버린 주인공, 위험 앞에서 형편없음을 드러내는 전문가들, 부모를 먹어치우는 아이를 통한 가족주의의 비판, 모두가 죽어버리는 절망적인 엔딩, 흑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제기된 인종에 대한 문제(주인공을 괴물로 인식해서 죽여버림) 등 광범위한 비판의 코드가 영화에 내재해 있었다. 이런 비판의 코드들은 공포영화가 가진 기존의 인식을 완전히 변화시킬만한 그런 것이었다. 로메로가 이후 '고어'를 사용한 다른 모든 감독들(비단 공포영화 감독이 아닐지라도)에게 하나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이야기해도 크게 과언이 아닐 것이다.
- to be continued...
2차대전 종전 후 국제정세의 개편으로 등장한 매커시즘과, TV의 보급으로 인해 영화산업은 다소 도전을 받게 된다. 호러영화 역시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는데, 50년대 중반 이후 위대한 감독들이 도래할 때까지는 약간의 침체기를 겪게 된다.
물론 이 시기에도 잘 만들어진 호러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매커시즘의 불안한 심리를 스크린에 나타낸 돈 시겔의 '신체강탈자의 침입'이 있었고, SF호러물이라 할 수 있는 'Them!'과 'Creature from the black lagoon'과 같은 작품들이 나타났다. 50년대 주목할만한 사실 중 하나는 SF호러물들이 약진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The Blob'이나 'The Fly' 등도 이 시기(50년대말)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SF 호러물들의 약진은 순수 호러팬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부터 언급할 사건들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고 봐도 좋을만큼, 50년대 중반으로부터 60년대초에는 각지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나타났다.
2차 대전 당시 인기를 끌던 스릴러영화를 찍던 히치콕은 60년 '싸이코'를 찍으면서 공포영화사에 한 방점을 찍었고, 그보다 이른 50년대 중반에는 그 유명한 해머사의 간판 '테렌스 피셔'와 지알로의 아버지 '마리오 바바'가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비슷한 시기인 50년대 중반 '로저코먼'이 등장했으며, 58년 'macabre'를 기점으로, '헌티드 힐', '13고스트' 등을 만든 '윌리엄 캐슬'도 등장했다.(개인적으로는 '스트레이트 자켓'을 윌리엄 캐슬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합니다.) 그 뿐이랴? '고어영화'의 선구자 '허셀 루이스 고든'도 1962년 '피의 향연'이라는 작품으로 대중에게 악명을 날리기 시작한다. 이런 60년대의 끝자락에 시체3부작의 '조지 로메로'까지 등장한다.(제스프랑코와 장롤랭, 로만 폴란스키 등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60년대는 이들 위인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내며 활약하고 후대의 감독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던 시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들 감독들은 '고어'에 있어 이전 감독들보다 나아간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검열의 완화나 상업적 측면 등 다양한 원인이 있었겠지만, 만드는 자와 마찬가지로 관객 역시 더 보고 싶어했던 것이 분명했다.
1) 50년대 중반 ~ 60년대 - 해머영화사의 전성기
50년대 중반 이후 영국은 호러영화에 있어 자신의 저력을 온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해머영화사는 검열이 완화되기 시작했던 51년부터 섹슈얼리티가 강조된 저예산 공포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테렌스 피셔는 52년 해머영화사에 합류하면서 인생의 절정기를 맞게 되어, '드라큐라', '프랑켄슈타인의 저주' 등 연이은 히트작들을 생산해낸다. 해머사의 영화는 '고딕호러'라는 이름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고딕호러란 고딕소설을 근간으로 하는 영화로서, 시대극과 같은 특징을 보이며(과거 소설을 근간으로 했기 때문에 당연하겠죠) 주로 악의 근원이 귀족층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딕소설로 유명한 것은 '프랑켄슈타인',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드라큐라'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 고딕소설의 많은 작품들이 이미 유니버설에 의해 영화화되었으므로, 해머사의 영화는 유니버설 호러영화들의 컬러 리메이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니버설의 몬스터들과 달리 테렌스 피셔는 '선악의 대립', '영혼과 육체의 대립', '계층의 대립' 등을 강조함으로써, 일말의 동정심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기존의 고딕소설은 새로운 각본들로 대체된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이야기들의 토대는 바뀌어 버리게 된다. 새로운 구미에 맞는 캐릭터들의 재설정이 이루어지고, 현대적 의미의 몬스터물의 정형화가 완성된다.
'호러 오브 드라큐라'가 인상만 잔뜩 쓰고 있는 벨라루고시를 귀족 신사의 모습인 크리스토퍼 리로 대체해버리는 것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호러영화가 다시 돈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 장르는 크리스토퍼 리나 피터 커싱과 같은 스타 배우들을 만들어낸다.
2) 지알로 무비의 완성 - 마리오 바바
1956년 리카르도 프레다는 바토리 백작부인의 범죄를 현대화시킨 '뱀파이어들(I vampiri)'의 작업을 맡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이태리 환타스틱 영화의 황금기를 촉진시켰다는 영화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호러팬들에게는 마리오 바바의 등장을 부추킨 영화로 더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제작진들과의 불화로 프레다가 촬영을 포기하자, 원래 사진 감독으로 고용되었던 마리오 바바는 영화를 완성했다. 특히 그는 이 작품에서 공작부인의 노화장면을 찍음으로서, 공포영화감독으로서의 싹을 보이게 된다. 4년 뒤 바바는 '악마의 가면(The mask of satan)'으로 첫 장편영화를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이 작품에 등장했던 바바라 스틸은 향후 '호러퀸'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피셔가 '선과 악'을 대립시켰다면, 이태리의 바바는 '진실과 거짓'을 대립시켰다. 이는 지알로가 일종의 잔혹추리물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선악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바가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인간의 두려움이나 광기로 인한 파멸이었다. 바바의 영화들은 관례적인 신화나 소설 등에서 벗어나 인물들의 두려움이나 광기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이끄는, 일종의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인간 행동의 결과로 가장 비극적 결말인 죽음과 살해에 집착하고, 이는 당연하게 잔혹함으로 나타난다.(사진은 절판된 바바 박스셋, 'The whip and the body'를 포함한 3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3) 고어영화의 등장 - 허셀 고든 루이스
미국에는 1951년 이후 드라이브인 극장이 상당히 많이 생겨났다. 1963년에는 미국에 대략 4천개 가량의 드라이브인이 있었고 이들 극장은 전체 극장 수입의 33%에 달하는 수준까지 성황했다. 메이저 영화사들은 이러한 형편없는 극장에 자신의 영화 상영권을 주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고, 따라서 처음의 드라이브인의 상영작들은 대체로 옛 영화의 재상영이었다. 영화 자체보다는 외출의 마지막 코스로 이 곳을 택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영화의 질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저렴한 가격과 화목한 분위기로 인해 가족 관객들이 이 곳을 많이 찾았다. 그러나, 50년대말 이후 TV의 보급으로 인해 고객층은 자유의 공간에 매료돵한 학생들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드라이브인은 '개척 영화'들의 도약을 가능하게 했고, 첫 고어작품인 '피의 향연' 역시 이 곳에서 개봉하게 된다.
감독 허셀 고든 루이스와 제작자 다비드 프리드먼은 원래 싸구려 누드 영화의 전문가였다. 그들이 드라이브인에서 보잉이라는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무렵, 메이저 제작사들이 대담한 영상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변화가 필요했고 이런 변화의 아이디어를 19세기말부터 파리 등지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잔혹 연극 '그랑기뇰'에서 얻었다. 그들은 배급적인 한계로 인해 큰 영화사들이 찍을 수 없을만큼 지나친 고어를 선택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살 길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H.G.루이스는 'Gruesome Twosome', 'Wizard of gore', '2000 maniacs' 등 대략 10년여동안 여러 작품을 만들었지만, 자신의 돈을 투자한 후 그 돈을 되돌려 받기 위해 배급사를 찾아 뛰어다니는 것이 지쳐 영화산업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최근(2002년) 타인의 돈으로 찍는다는 조건하에, 41년만의 속편 'Blood feast 2 : All U can eat'로 잠시 돌아온바 있다.
당시 H.G.루이스와 필적할만한 활동을 보인 감독으로는 앤디밀리건('The Naked Witch', 'Bloodthirsty Butchers' 등) 정도만을 손꼽을 수 있다. 앤디 밀리건은 자신이 사망하기 1년 전인 90년까지 대략 20편 이상의 공포영화를 더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도 역시 H.G.루이스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선구자였을 뿐 거장이라는 칭호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냉정히 말하자면 에드우드의 영화보다도 훨씬 허접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이들이 이후 공포영화의 잔혹성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공포영화의 고급화 - 살아난 시체들의 밤
67년 봄부터 9개월간 촬영된 'Night of the living dead'는 공포영화사에서 한 획을 그은 소위 위대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드라이브인에서 개봉한 후 70년에는 현대 미술관에서 소개되는 등 기존 공포영화가 누릴 수 없는 영화를 누렸다. 이후의 많은 공포영화에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70년대에는 한 학파를 만들어버릴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영화였다. 제작자조차 구하지 못해 자신들의 돈으로 설립한 제작사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에 대해 고급화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이 작품은 '겉'이 아니라 '속'에 있어서 정말 고급이었다.
이 작품은 제작비 때문에 공포영화로 장르가 선택되었고. 기록영화 스타일로 촬영되었고, 컬러보다 싼 흑백필름이 사용되었으며, 삼각대조차도 필요없는 핸드헬드로 촬영되는 등 처음부터 상업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그들의 제작사 '이미지 텐'에게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안겨주었는데, 배역들의 심리적 측면과 제한된 공간에서의 긴장감이 돋보인 것이 주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미지텐은 조지 A. 로메로를 포함한 10명의 친구들이 각각 6백달러를 출자해 만든 제작사로, 제작자를 찾지 못해 자신들이 직접 만든 회사입니다. 의외로 당시 10인 중 한 명도 호러 장르를 좋아한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제작비가 충분했다면, 이런 걸작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공포영화산업이 겪고 있던 그런 어려움을 감사해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H.G.루이스와 비슷한 엉성한 트릭으로 고어를 표현했지만, 이 작품은 루이스의 것과는 달리 완성도 있는 비판 덩어리였다. 로맨스에 빠지기엔 너무 넋이 나가버린 주인공, 위험 앞에서 형편없음을 드러내는 전문가들, 부모를 먹어치우는 아이를 통한 가족주의의 비판, 모두가 죽어버리는 절망적인 엔딩, 흑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제기된 인종에 대한 문제(주인공을 괴물로 인식해서 죽여버림) 등 광범위한 비판의 코드가 영화에 내재해 있었다. 이런 비판의 코드들은 공포영화가 가진 기존의 인식을 완전히 변화시킬만한 그런 것이었다. 로메로가 이후 '고어'를 사용한 다른 모든 감독들(비단 공포영화 감독이 아닐지라도)에게 하나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이야기해도 크게 과언이 아닐 것이다.
- to be continued...
# by | 2006/01/25 11:02 | 특집/칼럼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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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호러영화사를 연재하고 계시는군요. 잘읽고 갑니다.
얼른 다음편도...^^
호러영화 참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나이가 들어서 혼자서는 못봅니다...
슬픈일이죠...
아... 덧붙여서.. 링크신고합니다.~~
몰랐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고보면 새롭게 보이는 영화들도 많아서 이런글은 언제나 두근두근 합니다.
참 링크도 신고합니다.
Justin님/ 저 역시 편하게 글쓰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지라,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링크 감사드립니다.
소드님/ 아무래도 배경지식이 있으면 조금 색다른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
흥미가 땡기면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라, 이런 저런 작품 찾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김응일님/ '2000매니악'은 개인적으로는 H.G.루이스의 최고작인 것 같네요.
마리오바바의 다큐 재미있습니다. 봐주세요. ^^
C렉터님/ 아무래도 지금까지 계속 회자되는데는 그 이유가 있죠. ^^